잔인한 여름
김서영
아침부터 발광하던 여름 햇살이 오전 들어서는 토방 끝까지 기어들어 와 있었다. 마루에는 나보다 두 살 위의 사촌 언니, 여덟 살 사촌 동생 소년, 그리고 아홉 살 내가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날은 여름방학 중이었고 일요일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깨끗했고, 매미는 더 씩씩해진 것 같았다. 여름 한가운데 하릴없는 우리만 지루한 시간과 뒹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소리 나는 곳에 작고 검은 두 형체 보였다. 어쩐 일인지 아랫마을에 사는 두 살 터울의 언니들이 집 앞에 서 있었다. 평소 친하다고 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사이의 언니들이 집에 왔다는 게 괜스레 기분을 들뜨게 했다. 둘은 지름길인 산을 넘어 제법 큰 천이 있는 동네로 다슬기를 잡으러 가는 중이라며 나도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집에 있는 게 지루했던 나는 냉큼 뒤를 따랐다. 마루에는 내가 빠져나오기 전 모양으로 사촌 언니와 소년이 앉아 있거나 누워있었다. 나만 그곳에서 탈출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신이 났다.
산을 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이미 우리 집이 산 중턱 높이쯤 있었기 때문에 숲속을 걷다 내리막길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두 명의 언니가 앞서고 나는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내리막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나”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따라왔는지 얼굴이 땀범벅이 된 소년이 서 있었다. 신났던 기분에 귀찮은 일이 생기니 화가 났다.
“왜 왔어? 집에 가!”
그리고 홱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도 같이 뛰었다. 나는 뒤 돌아 더 크게 소리쳤다.
“집에 가라고!”
그러자 소년이 대뜸 주먹 쥔 손을 펴 보였다.
땀에 흠뻑 젖은 오천 원짜리 지폐가 손바닥에 붙어있었다. 놀란 나는 돈의 출처를 물었고 소년은 할아버지 지갑에서 꺼내 왔다고 했다.
“미친 새끼”
나는 욕만 했을 뿐 처음처럼 화가 나 있지는 않았다. 소년이 웃었다. 같이 아이스크림 사 먹자고 말했던 것 같다.
우리는 해가 머리 위를 지날 때 천에 도착했다. 칠월의 태양 아래 한 시간을 걸어온 몸은 불 속을 걸어 온 듯 뻘겋게 달궈져 있었다. 눈앞에 넓은 천이 보이자 우리는 홀리듯 물속으로 들어갔다. 한 참 물놀이를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도 슬슬 돌을 뒤지며 다슬기 잡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들의 집중력이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태양 아래 머리와 등이 또 달아오르자 두 살 터울에 언니 중 하나가 다시 물놀이를 하자 했고 모두 그러자 했다.
언니는 이전에 수영한 적이 있다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천 중앙에서 바깥으로 살짝 비껴 있는 곳에 제법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고 넓은 물웅덩이도 있었다. 언니는 물웅덩이를 가리키며 수영할 장소임을 알려 주었다. 물색은 맑고 짙었다. 속은 환하게 드러나는데 깊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그곳으로 이끈 언니가 말했다.
“손을 잡자”
그리고 들어갈 순서를 정해주었다. 가장 어린 소년을 앞으로 세웠다.
“남자가 먼저 들어가야 해”
“왜?”
내가 물었다.
“원래 그런 거야”
키가 크고 나이도 많은 언니들이 먼저 들어가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처럼 명령하는 말투에 더 이상 따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소년과 나, 두 언니 순으로 손을 잡고 물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내디디며 물속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내가 다섯 발짝 정도 들어갔을 때였다. 물이 순식간에 입까지 넘실댔다. 바닥을 아무리 짚으려 해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들어온 방향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을 뻗어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놀람과 안도 속에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이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분명 손을 잡고 있었다. 힘을 주어 나는 소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더 크게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소년이 산에서 내려오며 불러던 그 목소리로 “누나”하고 대답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내가 놓친 소년의 손이 대답 대신 물속을 할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기억이 사라졌다.
소년은 어느 고등학생에게 건져져 오후 햇살 아래 눕혀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소년에게 하얀 수건이 덮였다. 나의 울음이 어땠는지, 소년의 이름을 얼마나 외쳤는지, 그 여름 아래 모두 소거돼 버렸다. 죽음은 조용히 잔인하게 일어났다.
사라진 기억 뒤로 도망이었는지, 집에 가려고 했는지 나는 혼자 걷고 있었다. 산을 넘는 지름길 대신 먼 길을 돌아가는 길이었다.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무 그림자가 길만큼 길어지고 있었고, 햇살이 푸른 잎에 닿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어쩌면 소년이 집에 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년이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걸음은 생각에 따라 빨라지거나 느려졌다. 하지만 희망은 어둠에 점점 묻혀갔다. 밤길을 걷는 무서움보다 집으로 가야 하는 무서움이 나의 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했다. 한 가족에게 쳐들어간 고통 앞에 내가 서 있었다는 것을, 온몸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갈 곳이 없었다. 아홉 살 나에겐 선택이란 고작 집뿐이었다.
집안의 불빛은 어느 때보다 밝았고 고요했으며, 어른들의 눈빛은 섬뜩하게 사나웠다. 말 못 하는 큰아버지는 내게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질렀고, 나를 자식처럼 대해준 큰어머니는 나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린 채 울고 있었다. 돈 벌러 도시에 간 부모를 대신해 나를 보살피던 할머니만이 소년과 내가 마지막으로 늘어져 있던 마루에서 나를 안아주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나도 무서웠다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억울한 생각도 들어 자꾸만 눈물이 났다. 다시 아침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 지루했던 시간으로.
밤이 깊도록 마루에 불은 꺼지지 않았다. 나는 설핏 잠이 들었다 깨었다. 소년이 나를 따라 나갔을 문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소년이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손을 놓치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먼저 들어갔다면, 아니 더 먼저 그 언니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화를 냈더라면. 아니! 아니! 내가 언니들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소년과 나는 어제와 같은 여름밤을 보내고 있을 텐데.
다시 잠이 들었을까, 꿈인 듯 몽롱한 나는 소년을 본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너의 손을 놓쳐서”
물속에 잠긴 새벽하늘 위로 소년이 둥둥 떠다녔다. 멀리 잔인한 여름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