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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당한 패배 덤덤한 승리    
글쓴이 : 이규봉    13-08-12 11:32    조회 : 6,063
                                  당당한 패배 덤덤한 승리
                                                                                                                             이규봉
  1971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작은 키에 내성적이었던 나는 학교 축구 대표 주전 공격수로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며 뛰어다니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 가끔 친구보다 더 멀리 차려다 교문 앞 문방구의 유리창이 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선명하게 들리던 순간에는 창공에 날던 새도 날갯짓을 멈추고 구름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날보다 훨씬 늦게 귀가해 망설이다가 무릎 꿇고 사실을 말씀드리면 예상과는 다르게 말없이 유리값을 챙겨 주셨는데 ‘어머니 죄송합니다’를 이불 속에서 몇 번이곤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검은 광목 책보에 싸온 흰 쌀밥의 도시락을 먹을 때면 옆에 앉은 단짝 친구 김기준은 부러운 표정으로 흘깃거리며 바라보곤 하였다. 반찬을 나눠 먹으며 별일도 아닌 것에 해맑게 웃던 기억이 새롭다. 60명이 넘었던 학급에서 반 이상이 가정 극빈자였다. 그들에게 점심식사 대용으로 가로 3cm, 세로 5cm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과자가 무상급식으로 제공되었다. 둥그런 함석 급식 통에 담긴 과자를 몇 개씩 생활 정도에 따라 개수를 달리하여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6학년인 짝의 형은 어디서 구했는지 과자를 동생에게 양손 가득 가져다주면 짝은 그 절반을 내게 주어 남부럽지 않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평온한 날들의 잔잔한 흐름을 깬 친구는 키도 가장 크고 힘도 가장 센 두 살 위의 주먹 짱 김철연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항시 예닐곱 명의 부하들이 따라다녔고 학교에서 아무도 그에게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여느 날처럼 짝으로부터 내게 전달되던 과자는 내 손에 도달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도착하지 않고 대신 “(아니)꼽냐?”라는 짧고도 익숙한 말만이 귀에 들렸다. 주먹 짱이 몇 명의 부하들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야! 너 이따 남산공원에서 한판 붙자!’라는 내 작은 목소리에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그러던가! 너 안 나타나면 죽을 줄 알아.”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같은 반 급우들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꽉 들어찼다.
  황야의 무법자를 연상시키는 결투의 장소에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를 응원하던 단 두 명의 친구는 후환이 두려워 멀찍이도 떨어져 고개만 약간 내놓은 채로 내가 덜 맞기만을 숨죽이며 기도하고 있었다. 공원의 움푹 들어간 천혜의 요새에서 삼사십 명의 구경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변변히 주먹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멱살을 잡힌 나는 몇 번이곤 내동댕이쳐지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당당하고 멋지게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거인의 웃음소리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크게 들려왔다.
 병원으로 업어가려고 기다리던 단짝과 또 한 명의 친구가 “다행이다”를 외치며 내 몸을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속상한 마음이 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울음 대신 작은 주먹을 꽉 쥐던 소년은 그 해가 지나기 전에 형님의 권유로 태권도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로 둘러싸인 바로 그 공원에서 남모르게 몸을 단련시키며 결투했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1977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수업시간, 뒷좌석에는 김기찬이라는 급우가 있었다. 당시에 축구를 좋아했던 나는 내 앞에서 상대편이 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참지 못했던 모양이다. 마침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게 되어 집중한 가운데 경기를 하게 되었다. 빠르고 현란한 개인기로 그 친구가 공격을 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왼 팔꿈치로 밀치며 나의 수비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엄연한 반칙이었으나 심판이 모르는 채로 이미 그는 골문을 향하여 다가서고 있었다. 꿈틀대던 오기가 발동하여 끝까지 쫓아가 거칠게 밀치며 공격을 제지하자, 그 친구는 힘에 밀려 나뒹굴었다. 몹시 아팠을 그 친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일어나라.’ 했더니 손을 뿌리치고 화가 나서 가버렸다.
 잠시 후, 체육 시간이 끝나고 길게 늘어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에 왁자지껄 등목하고는 황급하게 교실로 들어섰다.
  담임선생님 수업시간, 등 뒤에서 이상기류가 흐르고 예감이 좋지 않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큼직한 것이 얼굴을 밀치는데 그 친구의 팔뚝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고 또 참았다. 더구나 담임선생님 시간이었기에 불편한 심기를 누르며 칠판을 바라보는데 자꾸만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질질 끄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내게, 치사한 녀석으로 분류된 그 친구가 점심시간에 농구장으로 나올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초등학교 시절, 공원에서의 결투 이후 줄곧 새벽을 달려 심신을 연마했기에 당시 태권도 3단의 실력을 갖추고 있던 나는 여전히 내성적이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공원 결투 이후, 한 번도 남에게 욕을 하거나 손을 대 본 적이 없는 터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수락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치사함을 잠재우고는 싶었다.
 결국 농구장에 농구대가 기둥인 특설 링이 차려지고 적지 않은 관중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점심도 거른 채로 빙 둘러섰다. 먼저 그의 주먹이 제법 빠르게 들어 왔지만 이십여 회의 서해안지구 태권도 대회에서 금,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경험이 있는 내게는 그다지 위력적인 공격으로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그의 공격을 뒤 돌려차기 한 방으로 맞받아쳤다. 저만치 나뒹굴어 떨어진 그를, 더는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통에 내심, 극적인 상황을 기대하던 관중은 허탈한 표정으로 흩어져버린다. 넘어져 있는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아주려 하자 그는 완강하게 뿌리치고 만다. 불쾌한 치사함을 잠재웠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방과 후, 숙직실에서 그 친구 어머니께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자신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긴 하루였다. 참으로 유쾌하지 못한 두 번째 결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나고 보니, 좀 더 그의 입장에서 상처를 보듬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싸움은 하지 않게 되었다. 패배 덕분에 멋진 운동을 배우게 되었고, 승리는 소중한 겸손함을 가르쳤다. 결투 했던 공원과 농구장이 궁금하다.                                                                            2013년 7월 16일

황윤주   13-08-12 12:37
    
우와~ 일빠닷!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오호~~

마치 꿈꾸는 얄개 시리즈를 보는 듯한?
과연 선생님은 학창 시절의 '의리있는 싸나이의 모습' 이셨군요!
그대로 참기에는 도무지 마음 속 정의가 가만있지 않은 .. 그러나 내성적인 소년의 첫 베틀은 가슴 떨리는..
글에서 비록 싸움에선 지고 얻어맞기도 했지만 마음은 후련하였다에서  같이 긴장했던 제 맘도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싸나이 ... 이렇게 성장해 가는군요.
이후  오히려 승리를 통해 덤덤함과 겸손을 배우셨다는 대목에서 왠지 위인스러움까지 느껴졌답니다.
멋지고 재밌는 싸나이의 일화를 들려주셔서 읽는 내내 재밌었어요.
이규봉   13-08-12 13:05
    
네 감사드립니다. 만지작 만지작 하다가 첫 글을 올려 봅니다.
부족한 글 올리는 것에 조심스러워 하다가 이제 내어 놓고
매 맞으며 성장하기로 하였답니다. 
많이 드드려 주십시오. 항상 고맙습니다.
홍정현   13-08-12 22:13
    
점점 발전하시는 이규봉선생님!   
이차함수 그래프의 곡선처럼 쭉 치고 올라가네요.
선생님의 아름다운 묘사력과 치밀한사유가 제대로 방향을 잡아
계속 멋진 글로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전 문구류에 집착이 강해서
연필을 보는 순간.....'아~'하고 낮은 감탄사를 내뱉었답니다.
아까워서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이규봉   13-08-13 09:10
    
아 네...
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외제 입니다.
그 연필 깎으며 호흡의
크기를 조절하고 누군가에게 전하면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곤 한답니다.
세자루 솜씨없이 깎아 보았는데 부끄럽습니다.
고3들 수능 보기전에 여지없이 준비해 주는
제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부디 멋진 작가 아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쟁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축하 자리 동참하지 못해 다시한번 송구한 마음 보내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김인숙   13-08-13 06:13
    
와 --- 광야의 무법자답게 한 방에 날리셨군요.
패배의 아픔을 태권도로 역전시킨 규봉님.
인생의 역전 승리입니다.
항상 과묵하시고 남한산성에서의 호연지기는 '멋' 그 자체였습니다.

수채화 처럼 그림그리 듯 묘사하는 탁월한 표현법이
상황을 구체화 시킵니다.
대 작가의 달란트가 규봉님에게서 보입니다.
     
이규봉   13-08-13 09:13
    
선생님께서는 글도 시원하시지만 주변에 계신 분들께
하나같이 용기와 에너지를 주시는 기의 원천지 같다는
표현을 감히 해봅니다.
보이지 않게 그런 힘을 얻으신 분들 참 많으실 겁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윤송애   13-08-14 13:12
    
이규봉 선생님, 드디어 첫 글 올리셨네요.
그동안 선생님 글 읽으면서, 저희 수필반에서는
말씀을 많이 아끼시지만 글로 풀어내실 이야기들을
속으로 많이 품고 계시는 분이라는걸 느꼈어요.
외유내강의 전형으로 보이시는데요,
앞으로 선생님께서 들려주실 이야기들이 많이 기대됩니다.
     
이규봉   13-08-15 08:00
    
네 많이 지적해 주십시오.
열성적인 선배님들이 계셔서 더 긴장하게 되고
그런 기운이  전달되면서 다함께  성장해 가는듯
하여 참 마음 든든 합니다.
언제든 쓴소리 전해 주시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광수   13-08-19 14:55
    
내가 되돌릴수없는 실수를 한것을 일찍이(건강 실패)
터덕하셨네요. 엉망진창으로 맞게 했던 그 친구
덕분에 규봉씨가 일어설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듯 합니다.
우선 살아 있는 동안 건강을 잘유지하겠끔 하는 것이
금(Gold) 입니다.
앞으로 건필하시고 더욱 발전하시길......
     
이규봉   13-08-21 14:30
    
네 선생님 좋은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계기가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싶은 것을 보면 경험이라는 것 하나하나가 소중한것 같습니다.
더운 날씨 선생님께서도 건강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김옥선   13-08-24 10:54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 고생을
하셨을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땐 착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친구들이 많았답니다. 그런것이
힘들어서 학교를 그만둔 친구들도 있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운동으로 자신을
바로 세우셨군요.
처음으로 게재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계속 정진하시고 건필을 빕니다.~^^
이규봉   13-08-28 14:20
    
네 선생님!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미움보다는
옛 정이 살아나고 참, 추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답니다.
공부는 잘 되어가시는지요.
참 대단하신 결정이세요. 그 열정이 좋은
기운으로 연결되어 항상 편안한 모습이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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