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패배 덤덤한 승리
이규봉
1971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작은 키에 내성적이었던 나는 학교 축구 대표 주전 공격수로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며 뛰어다니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 가끔 친구보다 더 멀리 차려다 교문 앞 문방구의 유리창이 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도 선명하게 들리던 순간에는 창공에 날던 새도 날갯짓을 멈추고 구름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날보다 훨씬 늦게 귀가해 망설이다가 무릎 꿇고 사실을 말씀드리면 예상과는 다르게 말없이 유리값을 챙겨 주셨는데 ‘어머니 죄송합니다’를 이불 속에서 몇 번이곤 반복하다 잠이 들었다.
검은 광목 책보에 싸온 흰 쌀밥의 도시락을 먹을 때면 옆에 앉은 단짝 친구 김기준은 부러운 표정으로 흘깃거리며 바라보곤 하였다. 반찬을 나눠 먹으며 별일도 아닌 것에 해맑게 웃던 기억이 새롭다. 60명이 넘었던 학급에서 반 이상이 가정 극빈자였다. 그들에게 점심식사 대용으로 가로 3cm, 세로 5cm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과자가 무상급식으로 제공되었다. 둥그런 함석 급식 통에 담긴 과자를 몇 개씩 생활 정도에 따라 개수를 달리하여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6학년인 짝의 형은 어디서 구했는지 과자를 동생에게 양손 가득 가져다주면 짝은 그 절반을 내게 주어 남부럽지 않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평온한 날들의 잔잔한 흐름을 깬 친구는 키도 가장 크고 힘도 가장 센 두 살 위의 주먹 짱 김철연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항시 예닐곱 명의 부하들이 따라다녔고 학교에서 아무도 그에게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여느 날처럼 짝으로부터 내게 전달되던 과자는 내 손에 도달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도착하지 않고 대신 “(아니)꼽냐?”라는 짧고도 익숙한 말만이 귀에 들렸다. 주먹 짱이 몇 명의 부하들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야! 너 이따 남산공원에서 한판 붙자!’라는 내 작은 목소리에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그러던가! 너 안 나타나면 죽을 줄 알아.”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같은 반 급우들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꽉 들어찼다.
황야의 무법자를 연상시키는 결투의 장소에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를 응원하던 단 두 명의 친구는 후환이 두려워 멀찍이도 떨어져 고개만 약간 내놓은 채로 내가 덜 맞기만을 숨죽이며 기도하고 있었다. 공원의 움푹 들어간 천혜의 요새에서 삼사십 명의 구경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변변히 주먹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멱살을 잡힌 나는 몇 번이곤 내동댕이쳐지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당당하고 멋지게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가는 거인의 웃음소리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크게 들려왔다.
병원으로 업어가려고 기다리던 단짝과 또 한 명의 친구가 “다행이다”를 외치며 내 몸을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속상한 마음이 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울음 대신 작은 주먹을 꽉 쥐던 소년은 그 해가 지나기 전에 형님의 권유로 태권도장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로 둘러싸인 바로 그 공원에서 남모르게 몸을 단련시키며 결투했었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1977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수업시간, 뒷좌석에는 김기찬이라는 급우가 있었다. 당시에 축구를 좋아했던 나는 내 앞에서 상대편이 공을 가지고 있는 것을 참지 못했던 모양이다. 마침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게 되어 집중한 가운데 경기를 하게 되었다. 빠르고 현란한 개인기로 그 친구가 공격을 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왼 팔꿈치로 밀치며 나의 수비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엄연한 반칙이었으나 심판이 모르는 채로 이미 그는 골문을 향하여 다가서고 있었다. 꿈틀대던 오기가 발동하여 끝까지 쫓아가 거칠게 밀치며 공격을 제지하자, 그 친구는 힘에 밀려 나뒹굴었다. 몹시 아팠을 그 친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며 ‘일어나라.’ 했더니 손을 뿌리치고 화가 나서 가버렸다.
잠시 후, 체육 시간이 끝나고 길게 늘어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에 왁자지껄 등목하고는 황급하게 교실로 들어섰다.
담임선생님 수업시간, 등 뒤에서 이상기류가 흐르고 예감이 좋지 않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큼직한 것이 얼굴을 밀치는데 그 친구의 팔뚝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고 또 참았다. 더구나 담임선생님 시간이었기에 불편한 심기를 누르며 칠판을 바라보는데 자꾸만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질질 끄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내게, 치사한 녀석으로 분류된 그 친구가 점심시간에 농구장으로 나올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초등학교 시절, 공원에서의 결투 이후 줄곧 새벽을 달려 심신을 연마했기에 당시 태권도 3단의 실력을 갖추고 있던 나는 여전히 내성적이고 조용한 학생이었다. 공원 결투 이후, 한 번도 남에게 욕을 하거나 손을 대 본 적이 없는 터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수락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치사함을 잠재우고는 싶었다.
결국 농구장에 농구대가 기둥인 특설 링이 차려지고 적지 않은 관중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점심도 거른 채로 빙 둘러섰다. 먼저 그의 주먹이 제법 빠르게 들어 왔지만 이십여 회의 서해안지구 태권도 대회에서 금,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경험이 있는 내게는 그다지 위력적인 공격으로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그의 공격을 뒤 돌려차기 한 방으로 맞받아쳤다. 저만치 나뒹굴어 떨어진 그를, 더는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통에 내심, 극적인 상황을 기대하던 관중은 허탈한 표정으로 흩어져버린다. 넘어져 있는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아주려 하자 그는 완강하게 뿌리치고 만다. 불쾌한 치사함을 잠재웠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방과 후, 숙직실에서 그 친구 어머니께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자신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긴 하루였다. 참으로 유쾌하지 못한 두 번째 결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나고 보니, 좀 더 그의 입장에서 상처를 보듬었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싸움은 하지 않게 되었다. 패배 덕분에 멋진 운동을 배우게 되었고, 승리는 소중한 겸손함을 가르쳤다. 결투 했던 공원과 농구장이 궁금하다. 2013년 7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