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는 먹음직스럽지 않고 사람의 눈길을 끄는 색채의 화려함도 없다. 어쩌면 화장끼 없는 수수한 옷차림의 여인네들 모습이다. 외모는 꾸밀줄 몰라도 마음씨만은 곱고 고운 여인이나, 겸손과 미덕을 지닌 이들을 보면 모과를 떠올린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강원도에 사시는 시숙모님이 우리집에 오신 적이 있다. 젊을 때 홀로 되어 자식도 없이 외롭게 늙어가는 분이었다. 남편의 본가가 경상도여서 명절 때나 집안 대소사에서 뵈었을 뿐 내 집에 오신 건 처음이었다. 그 때 아이들을 처음 보셨는데 둘째 딸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 놈은 모개처럼 생겼구나, 왕할머니를 쏙 빼닮았네” 하셨다. 하필이면 예쁜 딸애를 못생긴 모과에 비유하실까? 속으로 언짢은 심사가 들었다.
남편의 할머니는 젊은 시절, 과부가 되어 넉넉치 못한 살림에 6남매를 먹이고 입히는 일이 여인네로서 힘겨웠을텐데도 여장부라는 칭찬을 듣고 사셨다. 자식들에게는 물론이고 며느리에게 까지 무섭게 하셔서 동네에서는 호랑이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고 한다. 남편 없이 식솔과 집안을 이끌어 가기 위한 방편으로 남들에게 한치의 틈도 허술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가 평생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 엄격함은 장손에게도 전달되어 남편은 담배를 배우지 않았고 나는 왕할머니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다.
아들 선호사상이 하늘을 찔렀던 시절에 경상도 사람들은 아들 낳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 것 같다. 시숙모님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1960년대에 정부에서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남편 입장에서 아들 낳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바램이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시숙모님은 아들 없는 큰 조카가 내심 안쓰러워서 둘째 손녀를 듬직한 아들 역할 하라고 애둘러 ‘모개같다‘고 표현하셨을까? 왕할머니와 닮았다고 하신 의도가 외모를 말씀하셨다기 보다 아들 없는 집에 기둥이 되라는 뜻이 내포되었다고 생각한다.
모과의 겉모습은 두리뭉실하고 더 못생긴 것은 주물러 놓은 것 처럼 울퉁불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육질이 연하지 않아 과일이라기 보다 한약재로 들어가야 할것 같은데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매혹적이어서 당당하게 과일로 대접받고 있다. 어느 한의사가 사상체질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모과에 대해 세번 놀란다는 것이다. “첫째 너무 못생겨서 놀라고, 두번째는 향이 너무 좋아서, 셋째 약효가 좋아서“라는 말을 듣고 시숙모님이 아무 뜻 없이 하신 말씀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화려한 원색의 색깔과 단맛을 지닌 과일들에 비해 모과는 드러내지 않고 가진 것을 안으로 감싼 진정성이 있어서 내면의 아름다움이 있다. 모과는 옛 어머니들을 떠올리게 한다. 금기와 인내가 미덕이라고, 자아는 없이 희생하며 포용으로 가족의 화합을 이루고 살았던 봉건사회에서의 여인들에 비할 수 있다. 열녀나 맏며느리는 그 시대에 최상의 호칭이었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속내는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한 예지만 어디 종가의 며느리들 손이 비단결처럼 매끄러웠던가.
딸만 셋을 키우는 조카 며느리에게 간접화법으로 딸애들 교육에 대해 넌짓이 가르쳐 주느라 모과 얘기를 하신 시숙모님이 자식을 낳아 키우지도 않고 어떻게 그런 지혜가 있었는지 존경하는 마음으로 추억하고 있다. 여자가 지녀야 할 덕성이 무엇이라고 꼭집어서 가르치진 않았으나 딸들이 장성해서 출가를 하여 부덕을 지니고 사회인으로 역할을 잘하는 것은 시숙모님의 염려 덕분이 아닌가 한다. 아이들이 제 앞가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가는데 기여를 하여 사람향기를 풍기기를 욕심내어 본다.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 사람이었나?를 부끄러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