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챙겨오지 못한 나는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휘어진 골목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놓칠세라 걷고 있었다. 골목길에는 거친 벽마다 움푹 들어간 경계들만이 한 집 한 집 구분을 짓고 있었다.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찍어 놓은 듯 작은 창문들이 보였다. 내가 그저 벽들과의 경계를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 동생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다 왔어, 여기야.”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나는 어질러진 마루 한 쪽에 걸려있는 커다란 호랑이그림의 액자가 걸린 것을 보면서 여기가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유년시절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는 몇 장의 사진 중에 호랑이 액자를 배경으로 웃으며 동생과 내가 고양이를 안고 서 있었다. 모든 것은 변했다. 그 액자 속의 동생과 나는 어느 새 중년이 되었고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부산시 동구 초량00동 어렸을 때의 우리 집 주소는 아직도 뚜렷하다. 늘 콩 시루처럼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산복도로의 86번 버스도 사라졌고, 어둑해질 때까지 우리가 달음박질 하며 놀았던 마을을 가로지르던 낭떠러지 밑으로 흐르던 시냇가도 도시 개발로 없어진지 이미 오래가 되었다.
동생은 그나마 가끔 왔던 탓에 스스럼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 나를 불렀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작은 방은 어둡고 병실 같은 분위기가 났다. 깔려있는 이불 주위로 약봉지들이 늘어져있고, 언제 먹었는지 모르는 컵과 그릇들이 질서 없이 마구 놓여 있었다. 동생이 흩어져 있던 잡동사니 그릇들을 가져나가고 나서야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왔나…….”
“예…….”
짧은 말이 오간 후로 아버지와 나는 별말 없이 어두운 방이 조금 익숙해질 때 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둠속에 있던 아버지의 얼굴모습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면서 유난히 쾡 해진 눈과 완전 백발이 된 머리와 너무 말라서 부러질 것만 같은 손등을 나는 가만히 보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목소리만큼은 아픈 사람 같지 않게 크고 뚜렷했다. 결혼 후부터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였으니 횟수로 20년이 지났음에도 며칠 전에 본 것처럼 모든 게 그대로 라는 것이 나는 신기하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새 어머니가 들어오고 어머니의 딸과 아들들이 함께 집으로 들어오면서 보냈던 나의 유년시절은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수난이었다는 표현이 딱 맞지 싶다. 신데렐라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어린 4남매가 있던 우리 집에 나이차가 많은 의붓형제가 북적북적 함께 살아간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 집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시절 학교를 마치면 그렇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아침에 학교를 가기 전에 집 청소를 깨끗하게 해놓고 무서운 언니들한테 소위 검사를 맡고 등교를 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무조건 복종하고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던 아버지를 차마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사춘기를 내성적인 성격 탓에 더 혹독하게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가 흠뻑 젖을 만큼 울면서 잠이 들었었고, 그때 나를 위로 해준 것은 학교 도서관이었고 책들이었다. 그 무렵 만났던 톨스토이, 서머셋 모옴, 전혜린, 괴테, 헤르만 헤세…….같은 책들과의 만남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시간들이었다. 아침이 오면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왔고, 학교를 마치면 도서관에서 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들이 반복되었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몸의 성장뿐 아니라, 경제적인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집을 나오게 되었고 독립했다. 그 후부터 나는 열심히 돈을 벌었고, 대학 공부도 혼자서 벌어서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편도 만나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아이를 낳고 지금의 엄마의 위치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물론, 그동안 새어머니의 장례식도 찾았고 형식적이지만 동생이 집에 돈을 부칠 때는 알게 모르게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연락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도 일방적이었던 아버지를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렇게 연락을 끊은 아버지였다.
팔순이 넘도록 건장하셨던 아버지가 올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위암초기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부쩍 나를 찾더라고 동생이 연락을 한 것이다. 연락을 받고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아버지를 만나보기로 마음을 바꿨고 지금 이렇게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가슴통증으로 힘들어 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다음 날 요양병원에 입원절차를 밟았다. 병원에서 아버지는 폐렴 합병증까지 와서 몹시 힘든 날들을 보내야했다. 링거를 계속 바꿔가며 놓고, 동생과 나는 산소마스크를 낀 채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만 한 달 넘는 시간을 서로 번갈아가며 돌보았다.
아버지가 병원에서 40일 째 되던 날, 갑자기 기력이 좋아진 모습을 하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더니 처음 보는 것처럼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 저 알아보시겠어요? 내 말에는 대답도 않고 계속 목 위 부분이 답답하다고 말은 못하고 손으로 목 부분을 가리키는 아버지였다. 나는 간호사를 불러서 가슴이 아프신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간호사들이 딱히 해줄 것은 없었다. 동생과 교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새벽2시쯤 핸드폰이 울렸다. 겨우 잠이 들었을 무렵 전화를 받았는데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허둥지둥 옷을 걸치고 새벽바람을 맞으며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무슨 일인지 자꾸만 손이 떨리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병실로 들어서니 아버지의 모습은 핏기하나 없이 잠을 자는 듯 간신히 호흡만 느리게 할 뿐이었다. 그나마 호흡도 어려운지 간호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나는 그 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버지의 호흡이 멈추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삐~ 호흡을 측정하는 기계음이 달라지면서 병실에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그렇게 그저 담담하게 보고 서있었다.
가족들을 모아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나는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집으로 가져와 유품이라고 받은 박스를 내려놓았다. 박스 속에 있던 아버지의 옷들과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옷 사이에 아버지의 낡은 지갑이 보였다. 나는 지갑을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신분증과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이 들어 있었고 다른 쪽을 열어보니 반으로 접혀진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어렸을 때 찍었던 흑백 사진으로 동생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동생과 내가 사진사 아저씨가 가져온 나무로 된 말을 타고 어색한 모자를 쓴 채 웃고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아버지의 지갑 속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이 사진을 늘 가지고 보아온 것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한참을 뒷정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자려고 누웠다. 눈이 무겁고 온 몸이 아픈 것처럼 나른했다. 그제야 내가 며칠째 잠을 자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누우며 애써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완전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어린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난한 아버지의 지갑이, 지갑 속에 있던 빛바랜 사진이 생각나면서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날 청소를 하면서 아버지의 사진을 우리 가족사진 위쪽에 함께 세웠다. 그리고 가만히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사진 속에서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