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란
김남신
조금은 지루한 오후시간을 보내고 이른 듯싶었지만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막 한술 뜨자 폰 벨소리가 울려 댄다. 실컷 있다가 밥을 먹으려면.......
"여보세요!"
"김 병일이 어머니세요? 저는 박 기태인데요. 안녕하세요?"
"응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웬일이니?"
놀랐다. 34살짜리 아들친구가 전화를 하다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병일 이한테 전화가 안 되어요. 도무지 연락이 안 돼 어머니 전화번호를 저희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 큰 아들은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3년 전 남편 퇴직 후 우린 두 아들만 객지 생활하는 게 마음에 걸려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6개월쯤 후 큰아들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다니던 회사도 우리가 원하던 곳은 아니었다. 정말 기가 막혔지만 별 도리 없이 지켜보며 오히려 더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며 아들을 위로했다. 그래도 도서관에라도 다니며 공부하니 그냥 기다릴 수밖에는.
“무슨 일인데 급한 일이면 나한테 얘기해 전해줄게.”
"저기요, 홍영이가 오늘 자살했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아니 기태야! 너 지금 무슨 소리냐 검사됐다던 홍영이가 죽었단 말이야?"
"네, 그래서 저녁에 동문모임에서 다 가기로 했는데 병일이도 꼭 와야 되는데요."
오늘 저녁에 늦게까지 있겠다고 했다.
"그래, 좀 늦더라도 보낼 테니 네가 문자로 장소를 넣어 놔라." 하고 정신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게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아들을 둔 엄마로서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큰아들과는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서로 우위를 다툰 사이다. 홍영 이는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부모님이 원하는 서울법대를 제수해서까지 갔고 사법고시 합격 해 자랑스러운 검사가 되었다. 며칠 전에도 그 애가 제일 잘 되었다고 부러워하면서, 부모 뜻대로 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늦게까지 고생하며 동문회며 어떤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지내는 큰 아들을 겉으로 드러내진 못하면서 속으론 원망하기도 했었다.
뭐라 해도 죽음에 비할 수가 있을까? 너무 허무하다. 나도 아들 판검사 한번 시켜 보겠다고 얼마나 악을 쓰며 아들과 치열하게 다투었던가, 기어코 아들이 철학과를 선택 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거 같아 얼마나 절망 하였던가.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그 부모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얼마나 힘이 들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는다.
혹시 자살이 아닌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무지 사실로 받아 들여 지지가 않았다.
자살 할 애가 아닌데 착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효자다. 책임감도 강하고 고시 공부 할 때도 4시간이상 자본 적이 없다던데 그렇게 고생해서 이룬 걸…
솔직히 내 아들보다 잘났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더 부지런하고 효자인 건 틀림없었다. 그런 애가 어떻게 부모를 두고 자살을, 아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안절부절 못하는 동안 큰 아들이 들어왔다. 기색을 살폈다. 기운이 하나도 없이 멍했다.
정말 미운 아들이지만 요샌 내가 죄인처럼 눈치를 본다. 본인은 더 힘들겠지 싶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런데 오늘은 더 조심이 된다.
“검정 양복을 입고 가야지.”
“지금 안 갈 거예요 내일 낮에 갈게요 기태하고 통화 했어요.” 무슨 얘긴지 안다. 오늘 저녁에 선배 동창 후배들 다오니 못 가겠다는 거다. 내일 낮에 혼자 가겠다는 그 마음을 나도 안다. 또 가슴이 아프다. 어려서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속 한번 썩힌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까지 해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 이었다. 헌데 대학 진로 결정 때 처음으로 부모가 원하는 뜻을 거스르고 자기 고집대로 하더니만 지금에 이르렀다. 정말 판검사 하나 만들고 싶었는데…….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편도 밤새 잠을 못 들고 있다. 나보다 더 절실히 법대를 원 한 건 남편이었다. 그러니 충격 또한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난 법대로 가는 게 조금은 두려웠는지도, 너무 잘 알기에 우리 아들들은 엄말 닮아 조금은 게으르고 의지가 약해 그 어려운 공부를 독하게 해낼지 의심스러웠다.
요새 친정어머니 말씀이 네가 게을러서 시집을 늦게 가더니만 널 닮아서 아들들이 장가를 아직까지도 안 간다고 하신다. 그때 엄마도 속 상하셨다는 얘기다.
날이 밝았다. 둘째아들 출근시간에 맞추어 네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한다. 별 말은 없지만 서로 마주보며 밥을 먹으면 서로 그날의 기분을 알 수 있다. 그래 서울로 오길 정말 잘 한 거야.
얼굴을 쳐다보며 혹시 힘들진 않나 확인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누군가가 그랬듯이 오롯이 자기식구끼리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때라나,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식사를 마치고 작은아들은 출근하고 큰아들은 장례식장에 갈 채비를 한다. 자꾸 큰아들 얼굴을 살폈다. 충격 받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여린 구석이 있는 애라서,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이라나.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게 문제지만, 조금은 손해 보는 듯 그렇게 살아가겠지.
단정하게 차려입고 굳은 얼굴로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선다. 계속해서 홍영이 생각에 너무 아깝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의심스럽고, 슬프다.
복잡한 마음을 뭐라 표현 할 수가 없다.
“슬프도다! 부모는 나를 낳았기 때문에 평생 고생만 했다.” (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