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비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들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섣달 그믐날 갈가마귀 우짖는 소리가 그럴 법하다. 주변에서 사례를 찾아보자. 장마철 짐 부리는 이삿짐센터 특장차나 경적을 울리며 다급히 길을 헤치는 119구급차는 마음을 헤집는다. 아파트 좁은 복도를 걷는데 들려오는 억눌린 개의 신음소리도 답답하다. 주인이 외출하고 혼자 남아 그런 것일까? 슈퍼마켓 같은 데서 엄마 품에 안겨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랑 함께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도 서러운 것인지?
겨울을 재촉하는 비도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지난 휴일 ‘언뜻’ 비가 흩뿌렸다. 그러고 보니 11월 첫 주말도 비가 내렸다. 그날, 그러니까 첫 일요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뒤 광화문 골목을 걸었다. 때마침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젖은 나뭇잎들이 치솟았다가 불온한 삐라처럼 천지사방에 흩날렸다. 그 옛날 등굣길 상업은행 뒷골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생맥주집, 우동집, 생선회센터, 다방과 퓨전호프…. 아니 달라진 거리가 다시 옛 시절을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7080카페에 들러 음악을 신청해 듣는다.
록그룹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리더 믹 재거가 부르는 <옛 버릇은 끊기 어려워(Old habits die hard)>라는 노래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비통한 절규다. 이별의 아픔에서 헤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오래된 습관으로 남아 어린아이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처연한 내용이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기가 '11월의 비보다 어렵다(Harder than November rain)'는 표현이 나온다. 노래는 계속된다. ‘넌 내 마음의 벽 사이로 유령처럼 사라지고/나는 그만 어린애처럼 길을 잃었네~.’
헤비메탈밴드 건스 앤 로지즈(Guns N’ Roses)가 부르는 <11월의 비(November Rain)>도 11월이면 라디오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노래다. 9분이나 소요되는 곡인데, 뮤직비디오가 더욱 노래를 돋보이게 한다. 야외 결혼식장에 비가 쏟아져 난장판으로 변한다. 화면이 바뀌며 결혼식장이 침울한 장례식장으로 변하고 일렉트릭 기타 선율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가끔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죠/우리 모두 그러해요/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되자 않아요/차가운 11월의 비마저도~.’
비가 그치면 겨울이 성큼 다가오리라. 아니 이미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것일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들짐승은 어떻게든 겨울을 날것이다. 배낭을 베개 삼아 쪽잠을 자든, 구덩이를 파고 동면에 들든, 스스로 실종돼 거리를 방황하든, 아니면 가등(街燈)처럼 홀로 빛을 뿌리며 자신을 위로하든. 그런데 겨울을 두려워하면서도 겨울을 기다리는 이 마음 알다가도 모르겠네. 우리네 삶이 원래 모호하고 이중성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제 고백해야겠다. 겨울은 무섭지 않다. 가을이 더 힘들다. 좋은 시절은 바람처럼 지나갔고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엔 턱 없이 늦었다. 날씨든 삶이든 전조와 기미를 느낄 때가 더 견디기 힘들다. 벽이 무너져 내릴 때보다 한밤중 벽지에 물이 스밀 때가 두렵다. 번개의 찰나적인 번뜩임은 천둥보다 무섭고, 태풍은 여린 바람이 살랑살랑 잎사귀를 간질일 때가 더 불안하다.
11월은 11월은 끼인 달, 이도저도 아닌 달, 꿈속의 외침처럼 막막한 달, 안주 없이 들이키는 쓴 소주 같은 달이다. 눈물은 눈물로 씻고 싶고 울기 시작하면 목 놓아 울고 싶다. 절망의 늪에 한 발을 들여놓고 있을 때보단 절망 속에 침잠할 때가 안온하다. 몸이 고통스러우면 마음의 괴로움이 설자리를 잃어 견딜 만하니까. 눈물도 얼어붙는 겨울의 명징(明澄)함이 차라리 견디기 쉽다. 그래서 최백호도 ‘가을엔 떠나지 말라’고 노래했나 보다.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라’고.
계절이 계절인지라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이 작곡한 <마른잎>도 신청해 듣는다. 나직한 음성의 장현이나 짙은 허스키의 김추자도 좋지만, 그보다 임아영이 부른 노래를 듣고 싶다. 하이톤의 위태롭고 불안한 음색이 마음속 현(絃)을 건드린다. ‘마른 잎 떨어져 길 위에 구르네/ 바람이 불어와 갈 길을 잊었나/아무도 없는 길을 너만 외로이 가야만 하나~.’
박인수가 부른 소울 <봄비>도 생각난다. 이 늦가을에 웬 봄비? 마음이 허한 사람에게 계절이 무슨 상관이람? 도찐개찐. 엎어치나 메어치나, 가자미나 도다리나, 노가리나 코다리나. 마약과 기행, 가난으로 점철된 삶을 산 비운의 가수 박인수는 요즘도 병고에 시달린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한없이 흐르네~.’
* <<에세이문학>>(2015, 겨울호) 게재. 원제는 <11월의 비, 11월의 노래>.
인용한 노래의 가사는 재구성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