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의 아우
윤기정
동생을 기다린다. 입소자들이 만든 그림과 노작(勞作) 물이 선반에 전시된 방이다. 벽에는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인물들이 노인이라는 것만 빼면 여느 어린이집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남 일로만 여겼던, 드라마에서나 봤던 요양원 면회다. 복잡한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휠체어 한 대가 여닫이문을 양쪽으로 젖히면서 들어섰다. 두 살 터울의 바로 아래 동생이 거기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요양사로 보이는 여인이 둘째 동생 자리 옆에 있던 의자를 치우고 그 자리에 휠체어를 대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순간 시⋅공간이 물속 같은 침묵에 잠긴 듯했다. 그 정적을 휠체어의 동생이 느린 말로 깼다.
“형인지 몰랐어요.” 그 말이 ‘형이 그럴 줄 몰랐어요.’처럼 들렸다. 두 달쯤 전에 제수씨가 전화했다. 요 몇 년 동안 제수의 전화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처럼 알지 못할 불안을 안개처럼 피워 올리는 그런 것이었다. 동생의 음독 소식도, 속상한 하소연을 전한 것도 전화였다. 그날 전화도 그랬다. “아주버님. 더 이상 저 사람 돌보기 어려워요.” 제수씨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떨렸다. “힘에 부쳐서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 요양원 들어가자.”고 했더니 펄쩍 뛰고 서운해한단다. 많은 사람들이 요양원 입소를 버림받는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동생도 그런 마음이었을 게다. 제수씨는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동생과 40여 년 살아온 여인이다. 요양원에 가도록 설득할 테니 갈만한 곳을 알아보라며 통화를 끝냈다. 전화로 동생을 설득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갈 곳이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네 집사람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요양원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동생 요양원에 보내는 음모에 가담한다는 자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미안함이 마음속에 남아서 그렇게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아마비’는 이름에만 ‘소아’가 들었을 뿐이지 그 병증(病症)은 평생에 걸친다. 늙어가면서 보행만 아니라 온몸으로 마비 증세가 퍼진다. 퍼지는 게 아니라 숨었던 중세가 하나, 하나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앉고 일어나는 일조차 부축하지 않으면 어렵다. 씹고 삼키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기능도 떨어진다. 젊은 시절 앓았던 가슴 병 후유증으로 정기 검진받는 제수씨도 제 한 몸 간수하기 벅차다. 구구한 사연 듣지 않아도 형편이 빤했다. ‘요양원보다는 집이 낫지 않겠냐? 제수씨 힘든 거 알지만, 조금 더 참아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며칠 뒤 집 가까이 있는 요양원에 입소시키러 간다는 제수씨의 전화가 왔다. 어려서부터 형 말 잘 듣던 동생의 선한 얼굴이 흐리게 떠올랐다.
옛일들이 순서 없이 눈앞에 떠올랐다. 기억은 흐리나 장면은 선명하다. 동생은 고등학교에 군사 훈련 과목이 생기면서 자퇴했다. 그 뒤로 소규모 공장을 전전하며 성치 않은 몸으로 허드렛일했다. 십 수 년 뒤 중매로 결혼하여 두 식구 입에 거미줄 치지는 않을 정도로 살았다. 더 오랜 기억도 떠올랐다. 싸움이다. 동생 보고 ‘끌끌’ 혀를 차면서 “잘생긴 아이가 어째…”라는 어른들에게 대들고 있다. “왜 내 동생 놀려요.”라며, 어른들 입에서 “어이구. 미안하다. 동생 놀리는 줄 알았구나.”라는 말을 들어야 돌아서곤 했다. 동생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따라오는 아이들에게는 영락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형뻘 되는 큰 아이들도 그때만큼은 두렵지 않았다. 동생에 대한 기억은 어떤 기억이든지 마지막에는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동그란 눈, 말간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모습으로 끝났다. 지금처럼,
그간 말 상대가 궁했던지 동생은 쉼 없이 말했다. 마비가 혀까지 왔는지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면회 온 동생과 나는 가끔 턱을 주억거리기도 하고, 되묻기도 하며 이야기가 이어지도록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동생에게 들은 2층 생활실의 모습은 이랬다. 방은 네 명이 쓴다. 둘은 침대에 누운 채이고, 한 사람은 간혹 소리를 지르는데 자다가도 고함을 질러서 주변을 놀라게 하고 요양보호사들을 뛰어오게 한단다. 동생은 외부 강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거실 소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이제는 집 생각 덜 하고 적응하고 있단다. 그게 적응이 아니라 체념임을 어찌 모르랴. 생활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손을 흔드는 동생에게 ‘또 오겠다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제수씨가 집 가까운 요양원을 택한 속마음을 헤아리니 여전히 감사하다. 새로운 형식의 동행일까?
요양원은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프로그램도 좋아보였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요양기관 평가에서 받은 최우수기관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정문 옆에 세워놓았다. 우리는 요양원 정문을 나설 때까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딸자식 여읜 부모 마음이 이럴까? 다 좋다는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과 오늘이 닥쳐올 많은 헤어짐의 시작에 지나지 않음을 서로의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읽을 수 있었다. 둘째 아우 내외와 점심 먹고 그들은 보령으로, 우리는 양평으로 갈라졌다. 한 가지에서 나고 자란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낙엽 되어 바람 부는 대로 흩어진다. 어느 날 어디에서 저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거나? 형제 상봉의 시간을 동서와 그림자처럼 지켜본 아내가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변속 레버에 얹힌 아내의 손등에 중천 지난 짧은 동짓달 햇살이 포개었다.
2024. 봄. 『에세이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