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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 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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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선굴에서    
글쓴이 : 김아라    12-04-27 20:44    조회 : 6,723
환선굴에서
                                                                                                 
잊혀지는 것은 서글프다. 서러운 이의 허물어진 가슴에 어둠이 가라앉으면 사람에게도 굴이 생긴다. 동해의 파도소리가 듣고 싶어 떠난 여정에 환선굴이 끼어 있었으나 나는 시큰둥했었다. 잊고 잊혀지며 결코 뱉어내지 않았던 내 설움과 네 설움과 우리의 설움을 강원도 굴속에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절망이 목젖까지 차올라 숨쉬기가 어려울 때는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안다. 감춰진 속내를 들추어내기 싫었다. 가는 도중에 산수유가 꽃망울 몇 개만 매달고 있다면 그걸 핑계로 차에서 내려 사진이나 찍어볼 생각이었다.
 
삼척시 도계읍 대이리는 어둠 속으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동굴지대의 행정구역상 명칭이다. 메마른 산 중턱에 환선굴이 하품하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빛이 닿지 않고 사람이 드나들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동굴이다. 안으로 들어섰다. 굴은 크고 깊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두려운 마음이 인다. 벗어 들었던 겉옷을 다시 입었다.
 
동양 최대의 석회 동굴. 자연현상에까지 세계 몇 위, 아시아 제일 따위의 서열을 정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이라는 자조적 해석은 슬프다. 들어가면 누구도 돌아 나오지 못했다는 전설은 더욱 슬프다. 굴속으로 도망쳐 선녀나 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인물은 누구였을까.
 
그녀에게로 가려면 세 개의 문을 거쳐야 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검은 철제대문을 열면 다섯 걸음을 걷기도 전에 부엌문이 있었다. 말하자면 마당이 거의 없는 집이었는데 문들은 열 때마다 끼익끼익 울어대는 통에 몸이 저절로 고양이처럼 웅크려졌다.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뒤통수라도 보이는 날엔 집에 가서 숙제나 하라는 핀잔이 따라붙는 것과 그녀 어머니가 나와 서너 명의 친구들이 드나드는 걸 막은 일 사이에 흐르던, 어른들의 감정기류를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컴컴한 부엌 귀퉁이에 곳간으로 쓰면 좋을 듯한 작은 방이 있었다. 아궁이의 그을음이 옮아 붙은 시커먼 미닫이문을 밀면 지린내가 확 끼쳤다. 머슴애처럼 머리털이 짧게 깎여진 그녀보다 종이를 뚜껑삼아 덮어놓은 요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낮에도 전깃불을 켜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던 그 방의 창문은 어른 키 높이에 공책크기만 하게 달려 있었다. 열린 걸 본 적이 없었던, 그 집에서 그녀를 홀대하는 징표였었다.
 
우리는 그녀를 용이언니라 부르고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앉은뱅이네로 불렀다. 처음에 그녀를 찾아간 것은 바느질 때문이었다. 모래주머니나 머리띠를 만드는 귀찮은 일을 부탁하면 그녀는 몹시 기뻐했었다. 때론 친구 없이 혼자 찾아갈 때도 있었는데 군인담요 밑으로 나를 잡아끌어 앉혀놓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화는 빈약하고 결말은 항상 유치해서 나는 그녀가 여간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이 온통 그녀 이야기로 가득 찬 것처럼 고개를 가끔씩 끄덕이며 지루한 겨울날 오후를 지린내 풍기는 방에서 보내곤 했었다.
 
어른들이 없는 틈을 타서 세 개의 문을 넘나드는 일은 뭐랄까, 그 방에서는 무엇을 해도 간섭받지 않고 상대에게 겸손하지 않아도 괜찮은 절대 자유에의 탐닉이 아니었나 싶다.
 
가정시간에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하자 더 이상 그녀의 솜씨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다. 동화책은 소설로 바뀌고 동요대신 팝송을 흥얼거리면서 우리는 한순간에 그녀를 잊었다. 동네에서 그 방에 들락거린 건 우리들뿐이었으므로 거세당한 햇빛의 흔적 같은 작은 창문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 그녀의 방은 앉은뱅이네 굴이었고 그녀는 그녀 어머니의 굴이었을 것이며 우리는 그녀의 굴이었을 것이었다. 걷지 못한다 해서 어둠 속으로 밀려들어간 용이언니에겐 선녀나 도인이 되었다는 전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래 전에 죽은 그녀와의 추억이 왜 환선굴 깊은 곳에서 걸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굴 안엔 쇠파이프가 박혀져 길이 생겼다. 생각보다 훨씬 큰 공간에 주눅이 들어 전설 속 인물과 이야기해볼 깜냥도 못하고 촉수 낮은 조명을 따라 더듬더듬 걸었다. 지하계곡의 폭포와 웅덩이가 지상의 것과 닮았다. 신기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거장을 모사하는 예술가처럼 가련하다. 종유석들은 생성된 시기에 따라 빛깔이 달랐다. 빛이 없는 곳에서 저마다의 색을 지닌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안내표지의 글을 읽은 후, 종유석에 눈길을 보내면 그곳에 <관음보살>이 있고 몇 걸음 걷지 않아 <마리아>도 만난다. 설명이 없었다면 아마도 둥글고 매끄러운 돌덩이만을 보았을 것이다. 나의 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며 옳다, 그르다, 소리치는 편견의 정도를 측정당하는 듯해서 되도록 표지판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습관처럼 글자를 읽고 있었다. 굴속은 사람의 마음이고 세상의 모습이었다. 관광객이 갈 수 있는 곳은 1km정도다. 나머지 5.2km는 전설 속 그들의 몫으로 남겨주고 돌아섰다.
 
동굴 벽에 사람들의 소리가 부딪쳐 사방으로 튕긴다. 단체 관광객들이 들어온 모양이다. 그들의 걸음이 빨랐는지, 내 속도가 느렸는지 술에 취한 노파가 뒤따라오며 소리를 질러댄다. 노래인가 하면 넋두리고 이야기인가 하면 혼자 주정이다. 굴속 같은 세상을 한 바퀴 돌아서 들어왔던 곳으로 되짚어 나가는 인생이 저리도 혼란스러운가보다.
 
먼 곳에 있는 건 적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상처가 되어 가슴 속에 동굴을 짓는다. 그곳으로 떠밀려간 나의 선녀들은 열어야 할 문이 없는데도 돌아나가기엔 이미 늦었다고 밤마다 속삭여대므로 잠들기 어려운 때도 있다.
 
한 시간 남짓 어둠에 묻혀 있다가 굴 밖으로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등 뒤에 빛이 따라가고 있었다.
 
                                                 * 2005년 여름, <<책과 인생>>6월호에 수록/ 등단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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