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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백산 구봉팔문    
글쓴이 : 장전    17-09-22 20:58    조회 : 5,722
네 시경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어릴적 시골 작은 농촌 마을에서 살 때에는 문 밖에서 짹짹대며 지저귀는 참새 소리에 아침잠을 깨곤 했었다. 어제 저녁에 챙겨둔 생수 과일 등을 배낭에 챙겨 넣고 집을 나서 서둘러 약속 장소로 갔다. 벌말육교 옆 정류장에서 일산에서 목동을 거쳐 달려온 친구의 차에 올랐다. 얼마 전 개통된 광주-원주고속도로는 다도해에 떠 있는 섬들처럼 끊어졌다 이어지며 늘어서 있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시원스레 뚫려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친구들은 벌써 소백산에 안긴듯 그 산에 얽힌 옛 추억들을 쏟아 놓으며 한껏 마음이 들떠있다. 옹달샘이 있는 비로봉 아래 눈 덮인 주목나무 군락 아래서 친구들과 라면을 끓여 먹던 일, 시멘트 공장 은퇴 후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외숙부, 동네 부역을 나갔던 일, ...  소백산 자락이 고향인 두 친구의 공통분모가 많은 옛 기억들은 아련하고 애잔하다. 옛일들을 회상할 때면 스메타나의 교향시 '아름다운 몰다우'를 듣고 있을 때처럼 눈물이 가슴에서 찔끔 올라오곤 한다. 

남한강은 내 고향 선산을 지나는 낙동강의 발원지 태백 황지연못에서 멀지 않은 검룡소에서 발원한다. 검룡소에서 먼 길을 달려온 남한강은 단양의 황홀한 풍광에 빠져 쉬어가려는듯 시내를 S자로 굽이굽이 휘돌아 충주 쪽으로 흘러나간다. 북단양 IC를 빠져나오면 매포천이 남한강으로 안겨드는 곳 잔잔한 강물 한가운데에서 단양 8경의 으뜸 도담삼봉이 반긴다. 의자에 앉은 삼봉의 동상은 잔잔한 물 위에 자신의 모습을 또렷이 비추고 있는 세 개의 봉우리와 정자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 있다.

단양 버스터미널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부근 식당으로 들어섰다. 아욱과 올갱이를 넣고 끓여낸 단양의 국밥 맛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간단히 요기를 했던 터라 몇 술 권하는 친구 M에게 손을 내저었다. 남한강을 건너 솔티천을 따라 천동계곡으로 달리는 택시 차창 밖으로 녹음에 둘러싸인 소백산 자락 풍경이 스쳐간다. 석회암과 지하수가 어울려 수억년에 걸쳐 빚어낸 고수동굴과 천동동굴도 그 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건축의 주재료 시멘트도 석회암을 주성분으로 하지만 종유석이나 석순 같이 자연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지는 못한다. 염치를 모르는 자본과 성형미인이 넘쳐나는 외형 지상주의 시대에 '인간생활을 왜곡시키고 불평등과 사회악을 초래한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18세기 사상가 루소의 주장이 소생하여 꽃피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바램일 것이다.

천동관광지를 지나 다리안 관광지가 산행의 기점이다. 다리안 계곡은 오랜 가뭄에도 수량이 풍부하여 등산로 초입부터 산허리까지 시원스런 물소리가 산객을 따라오고 넓게 잘 다듬어 놓은 등산로는 넉넉한 그늘과 서늘한 바람을 안겨준다. 30여 년 전에 놓인 천동계곡 길은 벌목을 위해 놓인 것이라는 친구 H의 설명이다. 어렵던 시절 우리 부모들처럼 소백산도 자신의 몸에 수탈의 길이 놓이는 것을 소리없이 감내했을 터이다. 

해발 300여 미터 다리안 계곡에서 잘 다듬어 놓은 등산로를 따라 소백의 능선까지 오르는 길은 넉넉히 세 시간의 오르막길이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888미터 고지 이정표를 지나고 한참 만에 전망이 탁 트인 천동쉼터가 나온다. 계곡 물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는 천동 쉼터에서 숨을 고르고 약수터에서 목을 축였다. 명성황후의 와신상담 얘기가 깃든 '민백이' 대궐터도 스쳐 지났다. 비로봉으로 향하는 산행 길엔 정상으로 오르는 산객이 대부분이지만 배낭도 없이 이른 새벽에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산객들도 적지 않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나무들은 듬성듬성 하고 비로봉이 손에 잡힐듯 보이는 푸른 초장이 넓게 펼쳐진 능선에 올라서면 천상의 목장으로 들어선 느낌이다. 그 능선을 타고 넘는 바람은 목덜미가 시리도록 차갑다. 능선에 올라선 산객들은 소백산의 주능선이 펼쳐놓은 장관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발걸음을 쉬이 옮길 줄을 모른다. 충북과 경북에서 각각 설치한 해발 1439 미터 비로봉 표지석 주변에 산객들 줄이 길다. 차례를 기다리며 누군가의 부탁으로 스마트폰 셔터를 눌러주고 우리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사진을 남겼다.

비로봉에서 국망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펼쳐진 풍경은 지루해 하거나 힘들어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그저께 내렸다는 전례 없이 큰 우박에 철쭉이 꽃잎과 잎사귀를 깡그리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모습이 아쉬울 뿐이다. 국망봉에 닿기 전에 퇴계 이황선생이 다녀갔다는 소백산성 터 안내판과 성의 잔해가 보인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 고인을 못 뵈도 예던 길 앞에 있네 /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찌할꼬". 선생의 시처럼 그를 못뵈도 그가 간 길은 우리 눈앞에 또렷하다.

비로봉과는 달리 해발 1420미터 바위 봉우리를 인 국망봉은 산객들 발길이 뜸하고 한산하다. 그 국망봉을 지나고 서로 키 재기하듯 정상 바로 밑 부분에 송이버섯 모양의 바윗돌이 우뚝 솟아 있는 상월봉을 좌로 비껴간다. 상월봉을 휘돌아 가는 길바닥은 우박에 무차별 포격을 당한 철쭉이 녹차 잎을 건조하려 널려놓은 것처럼 잎사귀를 떨구어 놓았다. 우박에 찢기고 망신창이가 된 잎들이 내뿜는 엽록소 내음이 코끝에서 진동한다. 한 시경 상월봉과 신선봉 사이에 있는 늦은맥이재를 지나쳐 신선봉으로 가는 능선에 좌판을 틀고 배낭을 내리고 점심을 들었다. 뒤돌아보면 신선봉으로 난 길은 신선이 아닌 사람에겐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험해 보인다.

정상에 큰 바위 세 개가 또렷이 보이는 신선봉 허리를 좌로 돌아가는 길은 좁고 가파른 비탈이다. 넓고 비스듬한 비탈길  곳곳에 바위 아래로 쓸려 내려왔는지 콩알 보다 큰 우박이 녹지 않고 개구리 알처럼 수북하게 낙엽에 덮여 있다.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해발 1361 미터 민봉에 올라서서 지나온 비로봉 국망봉 상월봉과 그 봉우리를 잇는 능선의 수려한 모습을 조망해 본다. 날머리 구인사까지는 아직 먼 길인데 민봉에서 뻗어 내린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등 아홉 봉우리와 그 봉우리 사이의 여덟 골짜기, 즉 '구봉팔문(九峯八門)' 가운데 하나인 뒤시래기문봉이 자리하고 있다.

구봉은 평소 안개 속에 감춰져 있어 조망하기 어렵다는데 날씨가 맑고 쾌청하여 뒤시래기문봉 좌우로 예각 삼각형 모양의 뾰쪽한 정상을 가진 여의생문봉과 덕평문봉 모습이 또렷하다. 뒤시래기문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거의 수직에 가까워 거꾸로 올라가려고는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다. 간간이 놓인 밧줄과 나무 가지에 의지하여 신선들도 혀를 내두를 가파른 그 길을 내려오면 구인사 초대 종정 상월원각스님의 적멸궁이 있는 영주봉과 마주한다. 그 봉을 올라서면 지나온 험한 산행길과 달리 잘 정돈된 부처의 세계가 시작되고 산기슭 좁은 골짜기를 따라 구인사가 길게 들어서 있다.

구인사까지 시간을 묻는 우리에게 구봉 쪽을 바라보던 젊은 보살은 '뭘 그렇게 조급해 하냐'고 반문한다. 그 보살은 구인사 발 막차 시간에 쫓기는 산객의 마음을 알리가 없을 것이다. 전국 140여개 절을 관장하는 천태종 총 본산 구인사는 상월 원각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5천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 5층짜리 법당을 비롯하여 전국제일 규모다. 마침 5층 법당에서는 수백명의 여불제자들이 불공에 여념이 없다.

골짜기를 따라 늘어선 사찰 건물들을 지나서 일주문으로 빠져나오는 길은 오르기 힘든 해탈의 길처럼 가파르다. 막차 출발시간을 십여분 남기고 구인사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단양 경유 동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당초 예상보다 길고 힘든 산행이었지만 예전 산행 때와는 달리 소백의 속살을 조금 더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단양에서 내리는 H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눈을 감았다. 구봉팔문은 어떤 얘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마음 속에 이는 궁금증을 달래며 언제 다시 소백의 품에 안기기를 고대해 본다. 끝.

노정애   17-09-24 17:09
    
장전님 반갑습니다.
저희 한국산문에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산행기를 밀도 높게 아주 잘 쓰셨습니다.
평소에 글을 쓰시는 분은 아닌지요?
사진을 찍듯 아주 잘 설명하시고 간결한 문장 솜씨도 좋습니다.
조금 아쉬운점은 작가의 심상과 감동을 주는 사연은 빠져 있어서
좋은 산행기로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음에 또 다른 글 올려주세요.
무척 기대가 된답니다.
장전   17-09-24 19:39
    
노정애 선생님,  안녕하세요.
변변치 않은 글에 대해 애정이 듬뿍 든 조언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몇년 전부터 친구들 두어명과 단촐한 산행을 가끔씩 하는 즐거움을 찾았는데
산행중 틈틈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말씀대로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생각의 편린들을 나열하다 보니
제 스스로의 심상과 사연들이 녹아들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조언해 주신대로 더 깊은 생각과 공감하는 얘기를 써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장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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