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림 이야기
유 재순
교사로 일하면서 반복적인 업무와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쌓인 피로감을 풀려고 홍대 앞 화실에서 유화를 처음 배웠다. 물감이 기름지고 색감 농도가 짙은 유화에 이전부터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 그때가 20대 중반이었다.
처음 그려본 것이 페인트 통에 담긴 붉은 꽃다발이다. 세 번째로 그린 건 노란 프리지아 꽃그림이다 . 지금도 이 그림은 내 곁에 있다 . 언니는 이 그림이 가장 순수한 느낌이어서 내가 그린 것 중 최고라고 한다. 이 그림을 보면 초봄에 홍대 근처 재래시장 입구의 풍경들과 지하의 작고 아담하지만 눅눅한 느낌의 화실과 프리지아 꽃병이 올려진 정물대의 모습이 생생하다. 프리지아 꽃그림은 초봄의 풋풋한 느낌이 잘 표현된 것 같아 칭찬받을 만도 하다.
30대 후반에 직장을 관두고 오랫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취미생활을 탐색해봤지만 그림만한 것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온전히 색과 형태에 집중하면서 몰입의 즐거움을 맛본다. 육십이 넘은 지금도 그림만큼은 놓지 않고 있다. 근래에는 주로 풍경화를 그리다가 새로운 시도로 캔버스천 가방을 주문해서 가방에다 꽃그림을 처음 그려보았다. 꽃그림 가방을 선물로 받은 아이는 아주 만족해했다. 완성된 꽃그림 가방 사진을 친구들 카톡방에 올렸더니 자기들도 갖고 싶고, 딸들에게도 선물하고 싶다고 20 여 개를 주문했다.
재미삼아 시작한 것이 갑자기 일이 되어버렸다. 그려달라고 요청을 받는 순간은 흥분되기도 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내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일 때는 반응이 어떨까 싶어 마음이 조금은 떨린다. 반응을 궁금해 하다가 그림에 대한 평이 좋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였고 모두에게 예쁘게 잘 그려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숙제가 잔뜩 쌓인 학생의 마음처럼 이 숙제를 언제 다하지 하는 조급함도 일었다. 천천히 그리라고 친구들은 말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런 저런 그림들과 사진들을 수집하며 꽃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색깔들이 많은 것 같아도 막상 그리다보면 색들이 뭔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흰색 , 분홍색 , 보라색 , 빨간색들의 작은 꽃잎들이 그려지고 , 녹색 계열의 이파리들과 꽃가지들이 그려진다. 빛깔과 모양이 조금씩 다른 꽃병에 담긴 꽃그림 열개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밀린 숙제를 마친 듯한 개운함을 새삼 느꼈다.
어제는 우체국에 가서 꽃그림가방을 친구들에게 부쳤다. 현 , 선우 , 줄리안 , 크리스틴 등등 가방 임자의 이름과 내 이니셜 J.S.를 쓸 때가 제일 개운했다. 하나의 그림 작업을 마치고 마무리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가방은 또 하나의 자아라고도 한다. 가방 주인이 될 사람의 이미지를 내가 아는 대로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다보면 작은 성취감을 맛본다. 내가 그려낸 이미지와 가방 주인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져 만족해하면 더욱이나 기쁜 일이겠다. 해외에 사는 친구가 다음 달에 들어온다고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여섯 개를 부탁했다. 안느, 줄리엣의 이름이 적힌 꽃그림가방이 파리 시내를 내 대신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흐뭇하기도 하다. 늘 심심하단 소리를 달고 살다가 꽃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심심하단 소리가 내 입에서 쏙 들어가고 말았다 .
2017.11.9. 유 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