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에 대한 추억이 많다. 어려서부터 왜 그렇게 새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꿈속에서 조차도 늘 새를 소유하고 길들이고 영원히 함께 가까이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으니까. 그 결과 나는 좋아하다 못해 무수한 어린 새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에게도 영이 있다면 나는 그 죄를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 후회랄까,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이웃 마을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 사는 큰아이가 어떻게 길들였는지 노란색의 새 한 마리를 어깨에 올려놓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 새는 주인인 아이의 어깨에 앉아 있다가는 포르릉 하고 날아서 주위의 나무로 가서 날개를 치고 울고는 다시 그 아이의 어깨에 날아와 그 애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는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동화의 세계에 빠진 듯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후 나의 집요하고도 무자비한 새 새끼 수집이 시작되었다. 산으로 들로 새의 둥지를 찾아다니며 새 새끼들을 노획했다. 그러나 매 번 나의 새 새끼 양육은 실패였다. 아무리 정성으로 벌레를 잡아 가져다 주어도 입을 벌리고 먹으려 하지 않았고, 강제로 벌려 물려 주워도 삼키지를 않다가 죽어 버리고는 하였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새를 이웃마을 소년처럼 길러볼까?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방책이 서질 않았다. 나는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이는 새가 부화해서 눈도 뜨기 전부터 가져다 길러야 어미를 분간 못하고 먹이를 먹는다는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새 종류에 따라 아예 기를 수 있는 것과 기를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예를 들어 참새나 산새의 대부분은 양육이 불가하며, 때까치 종류의 새는 양육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때까치보다는 예쁜 산새를 기르고 싶었고 기왕이면 그 소년처럼 노란 딱따구리를 길러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이 새들은 높은 나무에 살고 있으므로 나로서는 포획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산을 헤매며 새끼가 아닌 알이 있는 둥지를 찾아 다녔다. 그리고는 알이 부화 될 때를 기다려 아주 어려 눈도 뜨지 않고 깃털도 나기 전 집으로 꺼내 올 계획이었다. 그래서 일정 간격으로 알이 있는 둥지를 확인해 보고는 돌아오곤 했는데, 어느새 어미는 그걸 알아차리고 알들을 모조리 품고는 어디론지 옮겨 버리고 말았다. 어미 새들은 위험이 닥칠 때마다 알이나 새끼들을 다 데리고 어디론가 도주를 하곤 했는데 나는 지금도 그들이 어떻게 그 많은 알이나 새끼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얼마 전 내가 사는 미국에서도 새들이 집 문 앞에 걸어 놓은 화분을 줄기차게 드나들더니 어느 날 그곳에 알을 네 개나 까놓았고, 곧 새끼들을 부화해서 기르고 있었다. 나는 밖을 들고 날 적마다 갑자기 새가 바로 앞에서 날아가는 바람에 기절 하듯 놀라기도 했지만, 새가 집에 들면 길조라는 믿음도 있고 해서 그대로 두기로 했었다. 그런데 새끼가 하도 귀여워 그 중 한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이 있는데, 다음 날 보니 어미 새가 내가 건드린 놈 하나는 아예 죽여 버리고 다른 놈들은 모두 데리고 어디론지 옮겨 가 버린 게 아닌가? 그 둥지는 화분 안에 걸려 있어서 땅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의 새끼를 옮겨 간 것인지 지금도 나는 그게 의문이다.
여하튼 나는 그 후로 산새를 기르고 길들여 보는 것도 포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때까치 새끼 두어 마리는 길들이는데 성공했었다. 내 의도한 바대로 어깨에 앉혀 데리고 다니거나 하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밖으로 도망가지 않고 내 집을 드나들고 하다가, 어느 날부터 뒤란 나무에 살다가 가을 겨울이 되어 야생조가 되어 버린 적이 있다.
수 년 전 이웃 친구 부부와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멕시코 국경인 ‘바하 켈리포니아’에 있는 해변 마을을 가 본 적이 있었다. 오는 도중 길거리에서 여러 마리 야생조를 파는 것이 보였다. 친구가 구경하고 가자고 차를 세우기에 내려서 보았더니 콩새만한 작은 새들을 팔고 있었다. 친구가 나더러도 사자고 하였으나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사양키로 하고, 그 친구만 네 마리를 사서 종이봉투에 넣어 국경을 넘어 왔다.
그들 부부는 곧 새장과 먹이, 물통 등을 사서 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친구가 나에게 비실비실 마르고 몰골이 험한 새 한 마리가 든 새 장을 가져와서 기르라고 하였다. 이유를 물은 즉 네 마리를 새 장 하나에 넣고 기르려니 서로 싸우다가 한 마리는 죽고, 또 한 마리는 죽기 바로 전 이리로 데려 왔다는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한 마리를 받아서 기르기 시작했다. 전에 내가 새에게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씻는다는 의미에서 지성으로 보살펴 다 죽어 가는 놈일지라도 살려 놓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먹이와 물을 자주 갈아주고, 또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상추와 참외, 수박 같은 과일까지 사다가 정성을 들여 돌 본 결과 하루가 다르게 놈이 되살아났다. 새는 얼마가 지나자 빠진 털이 다시 나기도 하면서 야생 원래의 아름다움과 윤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나 털이 다 나온 후의 새는 그야말로 한 송이의 야생 오키드(양란)와도 같았다. 얼굴은 붉고, 등은 진녹색이며, 배는 노란색, 검푸른 목도리를 하고 꼬리까지 달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놈은 털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제 야릇한 목소리까지 내며 노래까지 부르지 않는가.
나는 날이 갈수록 새에 흠뻑 빠지기 시작했다. 자고 나면 제일 먼저 새장으로 가서 놈과 눈을 맞추며 안부를 살폈고, 밖에 나갔다 들어와도 새장으로 직행하며 사는 나날이 보람으로 가득했다. 신비한 노랫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온통 그 쪽으로 열고 살았다.
나는 곧 놈에게 배필을 얻어주기 위해 새 점을 찾아갔으나 비슷한 새를 찾기가 어려웠다. 주인에게 물었더니 새의 종류를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을 샅샅이 찾아보아도 비슷한 새 종류는 있어도 같은 새 종류는 찾기가 어려웠다. 비슷한 종류의 새로는 "핀치"라는 새가 있는데 그것도 수 십 종을 넘는 것이었고, 크기만 비슷할 뿐 결코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시내에 있는 새 점이란 새 점은 다 돌아 다녔지만 같은 종류의 새를 찾는데는 실패하였다.
그렇게 배필을 얻어 주려는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와 새장을 들여다 보다 공연히 청소나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새 장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날씨에 새도 흥분을 어쩔 수 없는지 펄펄 날고뛰고 날렵한 몸을 이리저리 던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눈치 채지 못한 나는 우선 물통을 씻으려고 새 장 문을 연 채 손을 집어넣었다.
그 때였다. 새는 갑자기 몸을 날려 공중으로 붕 뜨더니 총알처럼 밖으로 빠져 나가 푸르릉 소리를 내며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는 곧장 그가 떠나온 멕시코가 있는 남쪽을 향해 쏜살 같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없이 물통을 손에 든 채 놈의 꽁무니만을 쳐다보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놈은 저녁에도, 또 다음 날에도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온통 새소리만 들리고, 눈에 보이는 새들이 다 내 새장에서 날아 간 새처럼 보여 숲마다 나무마다 눈빛을 던져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놈은 분명 집에서 얻어먹고 자라나서 스스로는 먹을 곡식하나 찾을 줄 모를 것이었다. 안다고 해도 이 도시 천지에 어디 제가 먹을 곡식이 있겠는가? 놈은 필시 하루도 견디다 못해 굶고 지쳐 낮은 곳을 헤매다가 들 고양이 밥이 될 가능성만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날아간 놈의 날갯짓은 오래도록 내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선명하게 살아났다. 창공을 향해 보란 듯이 퍼덕이던 야생의 몸짓......나는 왜 그들을 길들이지 못해 그토록 안달하며 살았을까. 새란 결국 사람에 길들여질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인 것을......
나는 집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남쪽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날아라, 새여!”
그리고는 집으로 가서 걸려 있던 새장을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이제 나는 하늘에서, 숲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자연으로 만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한 눈에 보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