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에 오래된 친구들로 구성된 테니스 동호회에서 게임을 하고 저녁에는 회식을 하였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에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무리를 한 모양이다. 늦은 아침인데도 속은 쓰리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어제 먹은 술이 몸 안에서 똬리를 틀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공영주차장에 주차시킨 차를 가지러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일요일에는 주차비를 받지 않아서인지 어제만 해도 한적했던 주차장이 온통 차량으로 가득하다. 빼곡히 주차된 차량 사이로 차를 빼내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주차된 차량들을 밀어내고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여 겨우 차량을 빼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주차장을 나서려는데 옆에 있던 차량의 뒷바퀴 부분에 긁힌 자국이 있다. 손으로 쓱 닦아 확인을 해보니 금방 긁힌 자국이다.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그냥 가버리자 하고 그냥 왔다. 나중에 발각이 되면 원래부터 긁혔던 자국으로 생각했다고 하지 뭐 하는 변명을 마련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세차를 하였다. 세차를 하면서 살펴보니 내 차의 운전석 앞부분에도 긁힌 자국이 있었다. 주차장을 나서면서 보았던 승용차 뒷부분의 긁힌 자국이 갑자기 눈에 밟혔다. 어찌한다? 그냥 집으로 갈까 아니면 다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할까 하고 망설였다. 신차로 보였던 빨간색 레이의 화난 주인 얼굴이 떠오르고, 혹여 발각되었을 때 경찰서를 오고가는 처량한 나의 모습도 보였다. 내 차에는 블랙박스가 장착되어있다. 블랙박스를 열어볼까하고 생각하다가 열어 볼 줄도 모르고 귀찮았다. 아무도 본 사람도 없는데 그냥 가라고 작은 악마가 귓속말을 한다. 갈등의 순간이 길어졌다. 한참을 망설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는 결론을 냈다. 주차장으로 다시 갔다.
다행히 차량은 그대로 주차되어 있었다. 긁힌 자국을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내가 긁은 것이 분명한데도 마음은 원래부터 긁혀있던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연락처를 찾아보니 운전석 부근에 연락처가 없다. 메모지에 차의 긁힌 부분이 원래부터 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 긁힌 것인지를 묻고 새로 긁혔다면 내가 긁은 것 같다며 연락을 주라고 핸드폰 번호를 남기고 돌아섰다. 무겁던 가슴이 메모지 한 장에 한결 가벼워졌다. 저녁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별일 아닌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갔다.
극장을 나서면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차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나로 하여금 보험사에 사고 신고를 하고 접수번호를 알려주면 차를 수리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월요일에 처리하겠다고 답신을 보냈다.
다음날 출근을 하여 사고접수를 하고 그 결과를 문자로 보내주었다. 차주로부터 답신이 왔다. 보험사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걱정 말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까지 곁들였다. 얼굴도 모르는 차주가 고마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작은 악마의 속삭임에 꼬드김을 당해 아무도 보지 않았을 것이라 여기고 사고를 회피했다면 창피하고 불안한 새해를 맞이했을 것이다. 조금은 번거로웠지만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