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과 소방본부장
김 태 겸
2000년 4월 7일 동해안 지역 최북단인 고성군에서 산불이 발생하였다. 산불은 태백산맥 지역의 높새바람을 타고 강릉시와 동해시를 거쳐 강원도 최남단인 삼척시까지 번졌다. 산불은 8일간 지속되었다.
산불 발생 초기, 도지사를 대신하여 부지사인 내가 산불 진화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삼척시 산불 현장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타고 가던 차량이 국도 주변에 옮겨 붙은 불길 속에 갇혀 버렸다. 도로 양쪽은 시뻘건 불바다였다. 하늘에는 불붙은 솔방울이 송진을 내뿜으며 총알처럼 날아 다녔다.
불길에 진로가 막혀 차량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산불 세력이 약화되기를 기다렸다. 같이 가던 일행은 모두 하얗게 질려 아무 말이 없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부임해 산불을 처음 경험한 나에게도 공포심이 스멀스멀 기어 들어왔다. 그렇다고 산불을 진화할 책임자가 공포심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한 마디 던졌다.
“모두들 걱정하지 마세요. 산불 진화 중 생명을 잃으면 순직으로 처리됩니다. 적어도 남은 가족들 생계는 보장됩니다.”
내가 던진 농담에 일행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불현듯 비감해지며 새로운 용기가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산불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은 틈을 타 불속 포위망을 간신히 뚫었다.
삼척시 지휘소에 도착해 소방용 헬기를 타고 화두(火頭)를 관찰하였다. 산불은 정상부근에서 커다란 타원형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엄청난 산불의 기세에 놀라고 있는데 갑자기 헬기가 공중에서 툭 떨어졌다. 조종사가 너무 화두 가까이에 접근하였기 때문이었다.
‘아, 이러다가 사고를 당할 수도 있겠구나!’
등골이 오싹 하였다.
야간에 육풍(陸風)을 타고 산불의 위세는 더욱 왕성해졌다. 산불은 빨간 입술을 탐욕스럽게 날름거리며 시가지 전체를 삼켜버릴 듯이 으르렁거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산불을 바라보고 있는 소방관계자 모두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새벽에 도 소방본부장이 직접 지휘하고 있는 산불 진화 현장을 격려차 방문하였다. 그는 산 쪽에서 바람을 타고 근덕면 해안 마을로 옮겨 붙은 화재와의 격렬한 싸움을 막 끝낸 다음이었다. 다행히 가옥 몇 채의 피해를 제외하고는 마을 대부분을 온전히 보전하였다. 휴식시간 동안 다음 작전을 위해 참모와 협의 중인 그의 모습은 비장해 보였다.
그는 큰 키에 특유의 절도 있는 모습으로 거수경례를 붙이고 상황 보고를 시작하였다. 연일 계속되는 산불 진화작업으로 극도로 지쳐 보였다. 야간에 더욱 기승을 부리는 산불로부터 마을을 방어하느라 며칠째 눈을 못 붙였을 것이리라. 그의 얼굴은 미처 닦아내지 못한 그을음으로 새까매져 있었다.
“소방본부장은 지휘자인데 왜 다른 사람보다 얼굴이 더 그을었나요?”
“산불 진화작업은 일종의 전투입니다. 전투에 지휘자가 생명을 걸고 앞장서지 않으면 누가 사지로 따라 들어오겠습니까? 제가 앞장서면 부하들이 저를 믿고 불속으로 뛰어 들지요.”
그가 덧붙였다.
“사고가 나더라도 앞날이 창창한 젊은 부하들보다는 제가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1,000명이 넘는 도 소속 소방공무원들의 최고 책임자였다. 현장을 방문하기 전, 나는 그가 후방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산불 진화작전을 벌이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화재 현장을 무선으로 지휘하는 한편, 직할 소방대를 이끌면서 직접 산불과 사투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소방공무원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뀌었다. 소방본부는 평소 다른 분야에 비해 우선순위가 뒤져 관심을 갖기 어려웠다. 그러나 산불 진화 현장에서 그들이 보여준 헌신적 노력과 동료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후 소방부문의 예산 지원과 사기 진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얼마 전 동해안 지역을 두루 여행하였다. 산불이 발생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삼림은 예전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때의 산불 흔적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찾아낸 산불의 현장에 서니, 온갖 감회가 밀려들었다. 문득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라는 옛 시조가 생각났다. 아련한 추억 속에 임무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소방본부장의 까만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