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분이 없는 미국의 묘지는 늘 산뜻하다.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어깨 너비만 한 묘석이 문패처럼 납작하게 깔려 있고 그 옆에 꽃을 꽂는 수통이 하나 패어 있을 뿐이다. 각자 자신의 연고인 묘지 앞에 꽂아둔 꽃들이 마치 꽃동산 같다.
실제로 이민초기에는 길옆에 묘지공원이 있어 차를 몰고 지나다닐 때 마다 꽃동산 공원인줄 알고 언제 한가할 때 도시락을 싸들고 꼭 놀러 오리라고 벼른 적도 있다.
어쩌다 고국을 방문해서 고속도로를 달려 보면 그곳엔 망자들조차도 특권층이 있다고 느껴진다. 산자락 곳곳마다 웬 봉분들은 그리도 많으며 산(生)사람의 집채보다 더 고대광실 같은 묘지가 강토를 짓누르고 있는 반면, 벌초를 게을리 하여 버려진 초라한 민초들의 보잘것없는 봉분과 묘자락은 보는 이를 슬프게 한다.
지난 주말에는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가 보여줄게 있다며 LA근교 글렌데일 시에 위치한 포레스트(Forest lawn) 묘지로 안내하였다. 전부터 그 주위는 많이 지나쳐 다녔으나 묘지가 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별 관심을 쏟지 않았었다. 시내와 너무 가깝게 위치하여 있고 또 그 크기도 작아 돈 많은 특수층들이나 죽어서 묻히는 곳쯤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친구는 이곳이 LA 관광코-스에 꼭 끼는 명소이고, 자신도 서울에서 누가 오면 꼭 데리고 오는 단골 코스라고 강조해서 나의 호기심을 북돋았다. 묘지가 다 그렇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리도 허세를 부리나 생각하며 나는 묵묵히 따라 갔다.
하지만 이곳은 좀 다른 듯도 했다. 우선 공원 위치가 남향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화사하기가 다른 곳과는 달랐다. 이곳 한국인들이 죽어서 많이 가는 헐리우드(Hollywood) 묘지는 위치가 북향이라서 을씨년스러웠고, 또 로즈힐(Rosehill) 공원은 한국타운과 너무 멀고 지나치게 넓고 높은 언덕이라 전망은 좋다만 아늑한 맛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곳은 그렇지 않고 아늑해서 죽게 되면 이런 곳에 뭍히는 것도 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 뒷좌석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차는 커다란 대리석으로 된 건물 앞에 정차했다. 우리들은 차에서 내려 ‘추억의 전당’이라 써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현관에 들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위세도 당당한 모세의 석상이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석상 앞에 서서 옷깃을 여미었다. 어디서 이미 본 듯한, 싸구려 모조품이 아닌 정품이었다. 그 밖에도 현관에 일렬로 늘어선 여인들의 석상들은 모두 다 그 정교함과 아름다운 자태가 가짜들이 아니었다. 얼마 전 이태리 피렌체에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났던 종류의 대작들이었다.
그리고 현관을 자른 넓은 방들에는 마치 분합모양의 대리석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말하자면 부유한? 유골들을 모셔 둔 납골당이었다. 누가 죽어서 이런 곳에 누워 있기를 바랐는지 모르겠으나 사체들을 모시는 납골당 분위기는 그리 탐탁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예술품들을 모아다가 우아하게 잘 꾸며 놓았다고는 하나 음침한 시멘트 건물 속에 으스스한 공기하며 아무리 망자의 유골이라 해도 이런 곳에 누워 있기란 편해 보이지가 않았다. 살아 있는 자의 느낌이라 그런지 몰라도 차라리 밖으로 뛰쳐나가 양지바른 잔디 아래 누워 있는게 훨씬 자연스러우리라.
이런 생각을 하며 현관을 스쳐 지나는데 방과 방 사이에 넓은 홀이 나오고 그곳에 “레오나르도”의 흉상이 주인인양 우리를 맞는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방으로 들어가니 방 전면에 커다란 색유리로 된 레오나르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이 총천연색 극장 화면처럼 보는 이들을 맞이한다. 소위 이 <포레스트 론>이 자랑하는 예술품 3부작 중에 하나다.
예수가 열두제자 사이에서 빵을 자르고 생선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누는 장면, 이 작품은 이 묘지의 설립자 이튼 씨가 이태리 밀란을 갔을 때 아씨씨 성당에서 본 후, 강력한 감동을 받고 수입하기로 결심하여 1931년 4월에 여기에 세우기로 한 작품이다. 나는 해설을 들으며 문제의 여성을 닮은 요한의 하얀 손과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예수를 팔아먹었다는 유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 밖의 예수의 열두제자들의 초췌한 모습을 보면서 그 때나 지금이나 인생들의 삶이 얼마나 곤핍한지를 생각했다.
납골당의 참관이 끝난 후 우리는 나머지 2부작이 있다는 ‘예수 순교와 부활’ 대작을 보관하고 있는 중앙 건물로 향했다. 대형 교회 또는 극장식 건물의 그곳에선 매일 오후2시에 그 작품들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 상연회가 열린다. 과연 크기가 미국 최대 196x45피트의 예수 순교 시 골고다 전경을 담은 대작이다. 어림짐작으로도 70mm 대형영화 스크린 네 배는 됨직한 크기다. 그 화폭에 당시의 군중 상을 폴란드의 화가 스타이카(Jan Styka)가 폴란드의 독립기념으로 예루살렘을 다녀온 후 제작해서 미국 센트루이스로 가져왔으나 너무 커서 전시에 실패하고, 관세 등 엄청난 비용 때문에 가져가지도 못하고, 시카코에서 잠시 보관하고 있던 걸 이튼 씨와 이 묘지 재단에서 1951년 구입, 이 묘지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그 후 25년 동안 이튼 씨는 3부작으로 예수의 부활에 걸맞는 작품을 모집하다가 미국화가 로버트 클락(Robert Clark)의 작품이 합당하다는 대표이사들의 만장일치 의견에 따라 1965년 3부작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요한 계시록의 예수 재림 장면을 골고다 그림의 3분의 1 크기로 그렸다.
마치 오래전 명화 ‘벤허’를 보고 감동받았던 것처럼 신성한 3부작의 위용에 감화되어 밖으로 나오니 울울하던 날씨도 밝게 개어 온화한 기온으로 바뀌어 있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거의 매일 지나치던 동네 묘지에 와서 이렇게 편안함을 느끼게되다니. 커다란 박물관에서나 느낄 법한 진한 감동을 경험하게 되다니-.
감동도 감동이지만 당장 나는 죽은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묘지의 설립자처럼 철저한 기독교의 신봉자라면 훨씬 내세에 대한 회의가 없지 않을까? 요즈음 사람들처럼 이 종교 저 종교에 대한 비교가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환경에 산다면, 그 영혼들은 선인들보다 훨씬 사후 처리 문제도 복잡하리라. 아니 신의 존재 유무를 놓고 따지는 것은 또 어떤가?
그건 그렇고 요즘은 세태가 유골을 묘지에 묻을 것인가, 화장을 해서 아주 흔적도 없이 흘려버릴 것인가를 놓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나도 몇 년 전 외국에 떠도는 삶이라 조상들의 묘를 돌볼 겨를이 없다하여 파하고 화장으로 처리하고 말지 않았는가. 살아가는 정황이 복잡하니 어느 자손이 시간 내어 조상 묘를 찾겠는가?
나는 친구와 양지바른 묘지를 거닐면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나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와서 예술혼에 흠뻑 빠진 후에는 생각이 달라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묘지를 한자락 구입해서 예술이 숨 쉬는 이곳에서 영면할 것인가? 물론 이곳은 마음에 드는 곳이니 묘지를 구입하자면 재정적 부담이 클 테지... 하지만 죽은 후에 재산 가져갈 특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하다가 다시 죽은 후에 어디에 묻히건 화장을 해서 태워 멀리 흘려보내 건 무슨 대수람...이런 저런 생각으로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 어느 무덤가에서 여인 한명이 서서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망자가 묻힌지 얼마 안 되는 묘지 같았다. 그 여인을 보자 갑자기 오래 전에 읽은 한편의 시가 생각났다.
내 무덤에 서서 흐느끼지 마라
나는 거기에 없고, 나는 자고 있지 않다
나는 불고 있는 수 천 갈래의 바람이다
나는 금강석처럼 눈 위에서 빛나는 반짝임이다
나는 무르익는 곡식위에 태양빛이다
나는 부드럽게 내리는 가을비이다
당신이 아침에 고요히 눈 떴을 때
나는 조용히 회전비행을 하던 새들이
급하게 서둘러 하는 비상이다
나는 밤에 빛나고 있는 부드러운 별이다
내 무덤가에 서서 통곡하지 마라
나는 거기 없고, 나는 죽지 않았다 (작자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