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판서 강의를 좋아한다.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강의보다 집중도 잘 되고, 강의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용이하다. 강의자의 필체 역시 새롭다. 악필도 만족스럽다. 악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오감을 기울여 강의를 들을 필요가 있다. 무슨 글씨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강의자의 눈과 입, 행동, 칠판에 주목하고, 목소리를 경청한다. 그의 몸동작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어느 날, 수업 도중 한 학생이 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께 질문을 했다.
“교수님! 인문학과 과학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요?”
그러자 교수님은 잠시 주저하더니 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문학은 없어도 죽지는 않아요. 과학은 없으면 죽습니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까요? 첨단 과학의 힘으로 우리의 생명을 연장합니다. 대답은 여러분의 생각에 맡길게요.”
삽시간에 교실이 시끄러워졌다. 나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는 의미 있는 수업이었다.
진시황제는 드넓은 중국을 통일한 뒤, 백성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분서와 갱유의 방법으로 그들의 문화를 탄압하였다. 문학을 통제함으로써 굳건한 지배력을 확보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독립운동 역시 한 장의 글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무궁화 노래를 보면 “이 꽃이 무슨 꽃이냐. 희어스름한 머리의 얼이요. 불그스름한 고운 아침의 빛이로다. <중략> 어이해 오늘날은 이 꽃이 이다지 야위었느냐.”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글을 보고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이는 편협한 국수주의도 아니고 제국주의도 아니다.
인문학과 과학.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에 관한 문제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단순한 질문이지만 어리석은 질문이다. 판서 강의를 위해서는 보통 분필을 사용한다. 분필이라는 것은 소석고제나 탄산칼슘을 응고, 경화시켜서 제조한다. 이 안에는 과학의 힘이 작용한다. 소석고제나 탄산칼슘은 단단하지만 부서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부서지면서 조각난 파편들이 칠판에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다. 강의를 하는 사람은 분필을 이용하여 글을 쓴다. 딱딱한 글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형태를 갖출 수도 있다. 칠판에는 분필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상이 글 속에 남아 자리 잡는다.
인문학으로부터 시작한 과학 사례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같은 문학작품을 보면 당시 기술로는 이룩할 수 없는 꿈의 세상이 펼쳐진다. 이 꿈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과학을 만들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스타워즈나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의 경우, 한 권의 책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영화화 되었으며 지금은 성공의 보증이 되고 있다. 더 이상 과학과 인문학 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나는 과학을 하지만 글을 쓰고 싶은 대학원생이다. 실험을 하면서 틈틈이 한 글자씩 써내려가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우울할 때나 기쁠 때나 함께 하는 글들이 모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새파란 하늘에 펼쳐 놓으면 수놓은 것처럼 박혀 있다가 희미하게 멀어져 간다. 글을 모으는 대학원생이다.
써 놓은 글을 나 혼자 보기 아까워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했으나 내가 제출한 글은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내 글을 읽어주던 고마운 친구가 말했다.
“형이 쓰신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지금까지의 글들을 읽어보니 하나같이 감동도 없고 교훈도 없는 글이었다. 글 쓰는 행복감에 젖어 마구잡이로 적은 글은 하나의 일기는 될 수 있어도 수필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 쓰는 방법에 대한 책을 몇 권 빌렸다. 가볍지만 지켜야할 것들이 기록되어 있는 책을 보며 지금까지의 문장들을 더듬어 본다. 만족스러운 문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 문장을 쓰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주일 뒤 그 문장을 다시 보았다. ‘있었다’ 보다는 ‘있다’로 쓰는 게 더 좋은 표현인 것 같다. 시간이 더 지나고 보니 ‘있다’ 보다는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글을 쓰는 게 점점 두려워졌다.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글을 쓰는 것이 적성에 맞는지 생각해 본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없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문득 글의 목적에 대한 생각이 난다. 나의 정의로써 글이란 의사를 전달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내 의사를 전달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써 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하얀 공책에 무의미한 직선과 곡선들을 조립해 생각을 정리해 간다. 몇 번을 읽어보고 수정한 뒤 다시 읽어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나는 한차례 더 성숙해질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누군가가 나에게 직업을 물어본다면, 그 때 나는 과학자이자 작가라고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