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데가 있다. 젊은 시절 평화시장의 도매상에서 잠시 일할 때였다. 어느 맑은 가을 오후, 시골풍의 아저씨 한 분이 나에게 디지털 손목시계를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였다. 무슨 시계냐고 물으니까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수학여행을 다녀오면서 선물을 하였단다. 딸에게 선물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그 아저씨를 보면서 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녀는 지나는 바람처럼 나의 가슴 언저리에 자리를 잡았었나보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서로 목례를 하고 ‘○민○입니다’하는 그녀의 인사를 들으면서 내가 되물었다. 한문으로 무슨 ‘민’ 자인가 하니 ‘백성 민’ 자라고 한다. 나의 이름 중간자도 ‘백성 민’을 쓰고 있기에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름 한 자가 같은 이유로 우린 동질감을 느꼈고 쉽게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였다.
난 그녀를 나와 온전히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녀와 나는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는 것으로 여겼다. 그녀가 나에게 잔소리를 할 때면 다른 눈으로 나를 보고 나의 길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하나인 우리는 아무리 큰 일이 일어나도 다툼이 없었다. 잘못을 하고 미안해하는 나를 보면서 그녀 혼자 씩씩거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도 나를 만날 것이란 말을 자주 했다.
결혼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결혼하던 해에 우린 결혼 25주년에는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로 여행을 가기로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주변 사정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직장생활에서 10여일의 휴가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그녀는 친구들과 나의 여정을 다녀왔다. 그 여행은 그녀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았나 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차를 마시며 그녀의 여행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그녀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오해하지 말라며 말을 꺼냈다. 멋진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거다. 난 좋지 하며 맞장구를 치면서 멋진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 뛰는 사랑이 멋진 사랑이란다. 참! 가슴 뛰는 사랑을 하려면 당신을 보면 가슴 뛰는 남자를 먼저 만나야 하는데 쉽겠어? 하며 웃어넘겼다.
무엇이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질렀는지는 몰라도 여행이후 그녀의 삶은 크게 변했다. 항상 아파트 주변과 옛날에 살던 아파트 친구, 그리고 학교 동창생들밖에 모르던 그녀였다. 문화교실에 가서 그림을 배우고, 사진작가 반에 들고 수영을 하고 쉴 틈이 없이 바쁘다. 퇴근해서 저녁 늦게 집에서 만나면 백수가 직장에 다니는 나보다 바쁘다며 농을 건네면 그냥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기숙사에 들어가고 집에는 그녀와 단 둘이 남게 되었다.
바쁜 회사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가 잠간 한가한 틈에 그녀의 사랑타령이 찾아왔다. 지난 시간들이 뒤를 이었다. 우리가 만나서 사귀다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그녀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 우린 만나는 순간 이름 한 자로 동질감을 느꼈고 친구가 되었고 그냥 살게 된 거였다. 우린 서로가 사랑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마음 한 구석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아 생각이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소녀다움이 나에게 표출된 후 난 그녀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녀를 아내, 엄마로서만 보았고 그렇게 대했었다. 나 자신도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삶의 가장 앞자리에 놓고 가족의 안위를 위해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살았던 것 같다.
다른 눈으로 보니 그녀도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호칭을 바꿨다. 이름 뒤에 여사란 칭호를 붙여 불렀다. 처음에는 낯설던 호칭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정겹게 느껴졌다. 그녀에게서 엄마와 아내의 딱지를 떼어냈다.
그녀는 무심한 남편을 오랫동안 말없이 섬겨온 외로운 여인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