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생각을 낳는다. 강남에 있는 건설기술교육원에서 일주일동안 직무교육을 받았다. 일상에서 벗어나니 많은 생각들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이야기를 하잖다. 강사의 말은 귀 밖에서 맴돌고 내 생각은 온 우주를 배회한다.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일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은 잔재들이다. 그 잔재들 속에는 한평생을 농부로 살다가 편안한 노년의 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농사를 짓던 시절, 들일을 하다가 참을 먹는 시간에 아버지에게 묻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왜 아버지 형제들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해요?’하는 나의 물음에 4남2녀의 장남인 아버지는 허공을 응시하며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을 주셨다. ‘우리 형제들도 결혼하기 전에는 동네에서 가장 의가 좋은 형제들이었다. 결혼하고 새살림을 하면서부터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거란다.’ 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아련히 들려온다.
아버지의 나이에 가까워지는 지금 아버지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은 나의 형제들의 삶도 아버지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의 살점을 떼 주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형제남매들이었다. 그러한 감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여겼다. 아니, 그리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었지만 막상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항상 삶의 맨 앞자리에는 아내와 자식들을 앉혀두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흐를수록 형제들과의 정이 옅어짐을 느낀다.
나의 피에는 어떤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진 내 인생의 이방인이었다. 아버지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술로써 달래려고 했고, 사랑과 미움이 얽혀있는 내 삶의 아픔이었다. 어린 나의 결정은 아버지를 그냥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고생만 하다 돌아가실 하나의 삶일 뿐이라고 내 생각을 정리하고 살았다. 그러한 생각이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나이가 들어서 깨달았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조국의 땅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내고 육이오 전쟁 전 후 7년 동안 20대의 대부분을 군인으로 살았다. 종전 후, 제대를 하고 농부로 살다가 6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자식으로부터 존경받지는 못했을지라도 아버진 그래도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환경에 맞닥뜨려졌어도 아버진 봄이 오지 않는 겨울나라에 태어나 나에게 봄을 찾아 주었고, 이 땅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어 자유를 주었고, 가난을 막아주셨다. 나는 아버지가 다듬어 놓은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무엇을 했나? 하는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나의 삶을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까 하는 자문에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인의 나라에서 태어난 기쁨과 나만의 꿈을 꿀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주었다면 난 나의 자녀들에게 무슨 선물을 준비하고 있나? 하는 물음에는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다. 홍수로 떠내려 보낸 강물을 되돌릴 수 없듯이 덧없이 보낸 시간들을 다시 누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에게 얼마간의 시간들이 남았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희망의 시간보다는 절망의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랑보다는 한이 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흙탕물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고난의 세계를 꿈의 세계로 바꿔냈다. 감내하기 힘든 역경을 담대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한 아버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DNA 어느 구석에 자신의 꿈을 새겨 넣어 두었을까?
그리운 그 이름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