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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신시대    
글쓴이 : 최재선    14-06-30 11:18    조회 : 6,002

불신시대

 

  "박경리"가 쓴 <불신시대>라는 소설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진영은 남편이 폭사하고 아들 진영이 무 마취 상태에서 뇌수술을 받다 죽어 충격을 받는다. 폐결핵에 걸린 진영이 병원을 찾았을 때 Y병원은 주사량을 속이고, S병원은 건달꾼이 의사를 하고, H병원은 빈 외제 약병을 내다 판다. 시주하러 온 여승은 시주로 받은 쌀을 시중에 내다 팔려 하고 문수 위패를 맡긴 절은 시주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 그리고 자신을 교회로 인도한 갈월동 아줌마에게 사기를 당한다. 진영은 절에서 문수 위패를 가져와 불태운다. 왜냐하면 자식을 잃은 아픔을 종교적으로 위안 받으려 했지만 물질적으로 타락한 종교에 아들 영혼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절망한 진영에게 사람이나 종교는 다 결코 믿을 수 없는 불신의 대상이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께서 8년 전에 구입하셔서 쓰시던 동력분무기가 고장이 나, 면에 있는 농기구 수리소에 갔더니 고칠 수 없다며 시내로 가야한다고 하였다. 9시부터 교수 퇴수회의를 시작하여 시내까지 갈 수가 없어, 마을 형님께 아버지를 부탁드리고 학교로 갔다. 회의를 하던 중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시다가 끊으셔서, 쉬는 시간에 전화를 드렸더니 받지 않으셨다. 저녁에 퇴근하여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엔진 속 실린더가 고장이 나서, 부품을 새로 교체하는데 25만원이 든다고 하셨다. 그리고 사장이 고체해도 얼마 쓰지 못하니 새 것으로 사든가, 돈을 좀 더 주고 얼마 쓰지 않은 중고로 교환해 가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고 하셨다. 아버지 말씀을 듣고서 개운하지 않고 뭔가 찝찝한 생각이 자꾸 꼬리를 물고 일었다.

  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당신 손때가 묻어 정이 든 것이라, 새 것을 산다거나 돈을 더 주고 다른 중고로 교환하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비싸다고 생각하셨으면서도 부품을 교환해 쓰시려고 분무기로 맡기신 것이었다. 그 동력분무기는 부모님께서 고향에 계실 때, 다른 사람 논을 임대하여 콩 농사를 지어 마련한 것이다. 집에서 4키로 정도 떨어진 논을 아침과 저녁으로 오가시면서, 어렵게 콩 농사를 지어 마련하신 것이라 남달리 애정이 더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사한 후에도 텃밭에 농약을 하거나 소나무나 잔디밭에 농약을 할 때 아주 유용하게 잘 사용하셨다. 어머니께서는 그 동력분무기를 보고 가끔 "우리 집 농사짓는데 가장 효자 노릇하고 있다."고 하실 정도였다.

  작년 이 맘 때 웬만한 농기계를 다 파는 오거리 어떤 집에서 고압식 분무기와 잔디 깎는 기계를 적잖은 돈을 주고 구입했다. 남도 말씨를 투박하게 쓰는 젊은 사장이 어찌나 간이 쏙 빠질 정도로 살갑게 말을 잘 하고 고향과 가까운 동향인이라 믿고 샀다. 그는 물건을 집에까지 배달해 주고 시연을 보이면서 "이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총알 같이 달려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후 소나무 밭에 농약을 하면서 작동이 잘 안 돼 전화를 했더니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바빠서 도저히 갈 수 없다며 싣고 오라고 하였다. 승용차에 들어가지도 않는 고압 분무기를 싣고 오라니, 동향인이라 믿고 샀는데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었다.

  며칠 후 집에 농약할 일이 있어 아버지를 모시고 분무기를 찾으러 갔다. 가는 길에 아버지와 나는 반드시 교환한 부품을 확인하고 영수증을 받아 오자고 했다. 사장이 하는 언행이 미덥지 않았고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근거를 확실하게 마련해두자는 뜻에서였다. 어렵게 농기계 가게 주변에 주차하고 사장에게 분무기를 찾으러 왔다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이 사장도 완연한 남도 사투리를 썼다. 나는 순간적으로 "사장님, 고향이 남도세요? 저는 순천입니다." 그러자 그 사장은 " 워메, 반갑소 이. 나는 영암이라."고 하였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부품을 교체한 내역서와 영수증을 써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장은 분무기 시동을 걸면서 새 것보다 더 시동이 잘 걸리고 오래 쓸 것이라고 하였다. "실린더 교체, 25만원"이라 쓴 간이영수증을 보고 나는 부품이 새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장이 당황하면서 장황하게 동문서답을 해 대기 시작했다.

  아버지나 나는 당연히 새 부품으로 교환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새 부품이 35만원인데 헌 부품으로 교환하고 25만원을 받으려는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져가서 맡길 생각까지 하다가 너무 야속하게 대하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나는 정중하게 새 부품으로 교환해 놓으면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겠다고 이야기 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아버지와 나는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백주대낮에 적나라하게 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영 불편했다. 아버지께서는 속이 많이 상하셨는지 혀를 차시면서 창밖만 바라보시고 계셨다.

  우리가 잘 아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아마 아버지와 퇴직하신 지가 꽤 되어 머리가 희끗하신 형님 되시는 두 분이 농약 통을 가지고 가시니까 촌로라고 생각하고 일 처리를 엉망으로 한 것 같다. 팔 년 전 집 지을 때 잘 아는 사람도 바로 눈앞에서 말 바꾸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사람까지 잃을 뻔했다. 우리는 불신의 시대에 각자가 서로 속이고 속임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제물일지도 모른다. 정직하게 장사하고 솔직하게 서로 소통하면 얼마나 기분 좋고 마음 따스해질까.

  집 근처 대형순두부집 앞에 있는 신호등이 빨간 불을 켜면서 가던 길을 붙잡았다. 점심시간이 꽤 멀었는데도 순두부집에 벌써 차량이 많이 드나드느라 건널목 일대가 혼잡했다. 이 곳은 건널목을 건너는 보행자가 거의 없어 운전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가기 일쑤이다. 룸미러를 보니까 내 차 뒤로 여러 대가 줄줄이 서 있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뒤에 있는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내 차를 들이받을 것만 같아 불안했다. 나는 곧바로 비상등을 켜고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께서 앞집에서 수박을 가져왔다면서 냉장고에 있는 수박을 꺼내 달라고 하셨다. 허리가 안 좋으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제법 무거운 수박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칼을 대려는 순간 갑자기 불신이 팽팽하게 다가왔다. " 이 수박은 과연 잘 익었을까? 수박에다 설탕물을 집어넣는다고 하더니 설탕물 집어넣은 것은 아닐까? 며칠 전에도 앞집에서 수박을 가져 왔는데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것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불신을 잠재우지 못하고 수박에 칼을 댔다.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이 쩌억 벌어지자 단 냄새가 주방에 확 퍼졌다. 허기지고 갈증이 난 터라 순간 군침이 돌았다. 달디 단 수박을 서너 조각 게눈 감추듯이 먹고 나서야 수박뿐만 아니라 호의를 베푼 이웃까지 믿지 못한 내 자신이 정말 한심했다. 나는 수박 한 조각조차 시원하게 먹을 자격이 없는 정말 마음 차가운 한심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불신시대를 사는 일그러진 자화상이 무서웠다.

 


임도순   14-06-30 15:37
    
안녕하세요?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인용에 문제가 있습니다.
윗글에서 - "박경리"가 쓴 <불신시대>~~~ 진영은 남편이 폭사하고 아들 진영(?)이 무 마취 상태에서 뇌수술을 받다 죽어 충격을 ~~ 시주하러 온 여승은 시주로 받은 쌀을 시중에 내다 팔려(?) 하고 문수 위패를 맡긴 절은 시주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에서 입니다.
"아들 진영이 무마취상태에서"에서  아들이름은 "문수"입니다. 그리고, "여승은 시주로 받은 쌀을 시중에 내다 팔려한다"에서 "시주쌀이 무거우니 진영이 사줬으면 했다"로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최재선   14-06-30 15:42
    
제 작은 실수까지 돋보기로 보듯이 끄집어 내시는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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