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한알 복하나 산청군교육삼락회 사무국장 박개동 아들을 잘 키워보시겠다고 진주중학교로 유학을 보내셨던 아버지께서 내 나이 열다섯 살, 여름 방학 때 돌아가셨다. 중학교 1학년인 나와 국민학교 5학년인 동생이 머리에 볏짚으로 만든 또아리를 쓰고 하얀 무명 두루마기 입고 울면서 상여뒤에 따라가는 모습을 보는 이들 모두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루던 시기라서 54명이 졸업한 입석국민학교에서 나는 진주중학 다른 친구 셋이 진주남중 그리고 몇 명이 단성중학교로 진학하고 집안이 어려워 진학을 못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마을 이장을 맡아 동네일을 보시던 아버지께서 지병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되었더라면 치료를하셔서 더 오래사시고 내 인생도 달라졌을 것이다. 마흔 둘에 혼자되신 어머니는 아들 둘을 위해 밤낮으로 일을하셨다. 전답 서너마지기 농사지어서는 세식구 밥먹고 살아가기도 힘드는 일이었는데 아들 둘을 진주로 보내서 공부를 시키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농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새벽에 소죽 끓여주고 나가서 품앗이해서 모내기하고 끝나면 소꼴베서 이고오시며 살림을 사셨다. 집에서 단성장은 십리길 덕산장은 시오리 길이었는데 덕산장에 가면 한되에 10원을 더 받을 수 있어서 무거운 보리쌀을 이고 덕산장을 보러 다니셨다. 몸집이 자그만 하신 내 어머니는 여장부셨다. 혼자 몸으로 품팔아 가면서 자식둘을 공부시키신 어머니 덕분에 나는 진주교육대학을 나와서 교원으로 근무할 수 있어서 퇴직한 지금은 연금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갈 수 있고, 동생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한일은행에 입사하여 일본 오사카 지점, 동경지점에 근무하다가 말년에 귀국하여 경기도 구리지점장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물론 우리가 진주에서 학교다니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동생과 자취생활을 하며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버스도 귀한 시절이라 장작과 쌀을 지고 2킬러미터나 되는 길리 정류소로 갔다가 버스를 놓치면 다시 이십리나되는 원지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도 했었다. 아들 둘 뒷바라지 하시느라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신 내 어머니는 손자들 넷을 엄마 젖 일년 먹고나면 받아서 다 키우셨다. 손자들이 진주에서 학교다닐 때는 같이 가셔서 아침 밥지어 도시락 싸서보내고 버스타고 오셔서 농사일 도와주시고 오후에 내려가시곤 해서 인근 학교에 통근하시던 선생님들이 출퇴근하시는 할머니라고들 하셨다. 막내가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 할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신 부지런하시고 열심히사셨던 어머니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살게되었고 아들딸들도 바르게 자라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 만나 잘 살고 있다. 그런 내 어머니께서 ‘밥 한알은 복이 하나’라고 늘 말씀하시며 쌀 한알 만들기 위해 일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 밥알을 남겨서야 되느냐며 밥을 귀하게 여겨야 복을 받는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밥그릇에 밥알이 붙어 나가면 맘이 편하질않아서 물을 부어서라도 깨끗이 하여 밥알을 남기지 않는다. 재직시엔 식사지도를 하면서 내 반아이들에게 ‘밥 한알은 복이 하나’라며 밥알을 남기지 않게 하였다. 아이들도 밥알을 남기면 복이 나간다니 말끔히 그릇을 비운곤 했다. 밥 한알도 귀하게 여기며 절약을 미덕으로 알고 살던 우리네가 급속히 경제가 발달되어 잘 살게되니 근검 절약이라는 말이 너무 멀어져만 간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요즈음 학생들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두고도 찾지를 않는다고 하니, 학용품 아껴쓰자고 강조하며 볼펜대에 몽당연필을 끼워쓰던 알뜰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절약정신은 옛말이 된듯하다. 절약정신은 어려서부터 몸에 배여야한다. 좀 넉넉하다고 함부로 낭비하는 습관, 사치와 허영심은 고쳐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