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은사님의 막내아들 결혼식날.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옛날 친구들을 만났다.
수년, 수십년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잊지못할 어떤분께 인사를 드렸다.
그분이 반가워 하시며 내 이름을 기억해 내셨다.
"자네 이름이 춘월이지?"
정정하여 일러드리고 돌아오는길. 자꾸만 나오는 웃음
삼월이는 계집종의 이름같고 춘월이는 기생 이름같은데 춘월이라고요? 삼월이가 더 낫지 않나요? 하며.
그 덕분에 상념에 잠겨 한 시절을 회상하며 왔다.
이름에 월 자가 들어가면 예쁠수가 없다고, 항렬상 호 자가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고.
고향 동네 어느집 딸들은 아름다울 미, 구슬 옥을 넣어 예쁘게 지었건만 뒤에 오는 호 가 영 받쳐주지를 못하더라고.
이름이 같아 인연이 닿았던 미국친구 조월호는 '달과 호수'라는 싯 적인 이름인데 나는 호경의달? 도시의달? 호경은 중국의 도시라던가?
새삼 이름을 불평한다기보다 삼월이든 춘월이든 부끄럽지 않게 살면 되는것, 내가 이름을 부끄러워 하는게 아니라 이름이 나를 부끄러워 하지않게 살면 되는것이라고.
붓글씨 배울때 스승은 내게 '소정' 이라는 호 를 주셨다. 작은정자라고.
두인을 '서운'이라고 주셔서 나는 좋아했다. '구름 깃든 작은정자'라니 얼마나 멋진가. 이게 감춰진 영등감 이었을수도 있겠다.
내 이름을 그렇게 기억하신분, 그분이 거저 내주신 방 한칸에서 같이 살던 두명의 친구를 예식장에서 만났다.
한 친구는 그분의 당질녀이고 또 한 친구는 고향동기다. 우리는 친구 따라서 아저씨라 불렀다. 직장에서는 과장님이고 아기가 하나있는, 비교적 신혼의 젊은 분을.
나를 서울로 불러 올리신 은사님의 처남이셨다. 선생님은 신도림동 종점에서 한지붕 밑에살며 직장도 넣어주시고, 부모님처럼 돌봐주셨다.
그 아저씨네서 살며 고향친구를 불러왔다. 그때는 서울에 아는사람 있으면 불러올려주고, 올라와 기대살고 했었다.
그 분 댁으로 이사가던날. 사모님은 내 살림을 한 이불보에 싸 주셨다. 이불이며 옷가지, 그릇, 양념등을.
난감해 하는 내게, 버스에 실어만 놓으면 간다시며. 다행이 종점인지라 둘이 힘들게 들어다 실었다.
그런데 화양동까지 가려면 을지로에서 버스를 갈아 타야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짐.
나는 홍당무가 되어 다른사람들에게 같이 들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그 짐 때문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가는데 간장 냄새가 났다. 바닥으로 조금씩 새어나오는 간장. 무거운걸 끌어 내리고 올릴때 뚜껑이 좀 열린듯.
짐 속에서 병을 찾아 마개를 꽉 돌려 막고는 내 마음은 무수한 눈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게 상처가 되었다.
짐을 그렇게 무겁게 가지고 간걸 후회했다. 두고 갔어도 살았을텐데, 간장만이라도. 그것땜에 더 잘 산것도 아닌데 그리 무거운 짐을 들고 힘들어 했다고.
세월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무거운 짐 내려놓고 가벼이 살다 가라고. 버릴 줄 아는 슬기를 가지라고.
그 시절이 머물러 있지 않듯, 영원히 그자리에 있는 사람은 없다. 세대는 교체되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흘려보내고, 내려놓고, 비우고, 접고, 그러고도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이 지혜일 것 이라고.
당질녀인 그 친구는 경기도로 내려 갔단다. 가평 어느 산자락에 '싸리꽃 향기' 라 이름짓고 펜션을 운영한단다. 이름도 어찌 그리 예쁘게 지었을까.
언제 한번 내려가 그곳에서 머물며, 싸리꽃 향기에 취해보리라 했는데, 아직도 못 이루었다.
또 한 친구는 같은 신학교를 나오고 목사가 되었다. 교회이름을 '사라반석' 이라 지었다. 정말 이름도 잘 짓는 친구들이다.
내가 암투병할때 이 친구는 김치, 반찬등을 가지고 찾아와 주었다. 그런데, 스커트 차림에 반찬가방을 짊어지고 와서 눈물나게 했었다.
여기까지 와서 보니, 지금 내 마음처럼 떠 오르는 시 한 귀절이 있다.
"주님. 지나간 모든 날들이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