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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글쓴이 : 이창원    15-04-02 17:14    조회 : 6,889

첫사랑?

 

 “너 숙이 첫사랑이었다며?” “응? 뭐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여자 동창의 말에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다시 술을 한 잔 따라 주더니 옆에 있던 숙이를 가리키면서 ‘네가 얘 첫사랑이었느냐?’고 물었다. 숙이는 술이 취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멍하니 있었더니 그 옆 다른 여자 동창생도 ‘오늘 숙이한테 잘 해주라’며 '얼씨구 경사났네' 추임새까지 넣는다. 더욱 당황한 나는 “오! 그래? 그럼 오늘 숙이랑 정을 쌓아 볼까?”하며 얼렁뚱땅 얼버무리려 했더니 모두 다 ‘오늘 숙이 너한테 맡긴다.’며 일어서 버렸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싶어 정색하고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숙이가 말하더란다. 내가 자기 첫사랑이었다고. 분위기를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숙이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다른 여학생 친구들은 진심으로 우리 단둘이 얘기 나누기를 바라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날따라 결혼식이 세 군데라 동창 자녀 결혼식 두 군데를 들린 다음, 마지막으로 회사 입사 동기 자녀의 세 번째 결혼식장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동창 여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친구들이 많이 모여 기다리고 있으니 늦어도 꼭 뒤풀이에 참석하라고. 내가 초등 동창회장이라 막연한 책임감도 있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목이라 그러겠다고 했다. 친구들이 헤어지기 전에 도착하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설마 그때까지 기다릴까 싶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도 계속 전화가 왔다. 어디까지 왔느냐며,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꼭 참석하라고. 서대문구에서 양재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양재역에 내려 버스 대신 곧바로 택시를 타고 기다리는 장소로 갔더니 노래방은 이미 끝나고 다들 근처 가게에 모여 마지막 잔들을 비우고 있었다.  

 숙이가 살았던 곳은 아버지 고향으로 서로 초등학교는 달랐지만, 중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친구이다. 아버지 고향에 놀러 갔다가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 같이 놀았던 적이 있었는데 숙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고향 마을 출신이라 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가끔 여러 친구와 같이 어울릴 때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성 친구로서 특별한 진척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또 단둘이 만나 데이트 같은 것도 해 보지 않았다.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중학교 때는 아버지 고향에서 서로 처음 만나 얘기도 하고 같이 놀았지만, 학교에서는 서로 부끄러워 드러내 놓고 사귄 것은 아니었지 싶다. 그때만 해도 남녀 학생들 사이에 좀 친하면 ‘누가 누구와 사귄다더라’ 하는 소문이 많았던 때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런 소문이 날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우연히 만나면 서로 웃으며 얘기하는 정도였다. 사귀고 싶은 마음은 생겼지만,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또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농업학교에서 채소, 화훼 등 연구생을 하느라 다른 데 눈 돌릴 여유가 없었고, 2학년 때는 이발관에서 일하느라 다른 학생들처럼 자주 놀러 다닐 형편도 아니었다. 온실과 농장, 이발관 일로 언감생심 여학생들과 어울려 논다는 것은 마음만 있었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연구생이라는 것이 새벽 일찍 등교하여 온실 환기하고, 꽃에 물 주고 난 다음 교실에 들어가야 했으며, 다른 학생들 집에 가고 나면 밤늦게까지 농장에서 일해야 했었고, 이발관 일도 밤늦게 끝나기에 친구 만나 놀 기회도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그야말로 공부와의 사투였기에 더더욱 다른 데 눈 돌릴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중학교 시절 내가 숙이한테 목걸이를 줬었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전해 줬을까? 숙이는 왜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지금 고백을 할까? 당시 우리 집안 형편에 목걸이가 어디서 생겨서 줬을까? 그동안 중학교 동창회나 동창 자녀 결혼식 때 많이 만났었지만, 근처에도 잘 안 오더니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나? 혹시 결혼생활이 힘든 걸까? 온갖 생각에 뇌가 복잡했다.  

 친구들과 헤어진 숙이는 술에 취해 조금씩 비틀거렸다. 아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니 더 취한 척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숙이 집으로 가는 데 숙이가 말했다. 그때 목걸이는 왜 줬느냐고. 그리고 왜 아무런 얘기가 없었느냐고. 나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일부러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제대하고 오니 너 없던데?” “기다리라 안 했잖아요!” 갑작스러운 존댓말도 그렇지만 숙이의 고함에 더 놀랐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이었나? 오늘의 이 상황이 진심이었나? 할 말이 없었다. 죄진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괜히 죄인이 된 나는 가만히 숙이 손만 잡고 있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숙이는 부끄러운 듯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내가 목걸이를 선물했기에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고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고.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일하는 모습도, 운동하는 모습도, 공부하는 모습도……. 그러나 끝내 답이 없었다고. 그리고 택시 바닥이 뚫어지라고 한숨을 쉬며 토해 내듯이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성공했잖아요. 잘 살면 됐어요.”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숙이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저 고개만 저었다. 나도 소리치면서 말했다. “지금 와서 어쩌란 말이고?”  

 숙이를 내려 주고 돌아오는 길에 목이 타서 택시 세워 놓고,  얼음냉수 사서 한 병이나 다 마셨다. 부디 행복하게 잘 살라고 빌었지만 아무래도 내일 아침엔 변비가 더 심할 것 같았다. 그 때 알았더라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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