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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실타래    
글쓴이 : 윤은숙    15-07-06 10:50    조회 : 5,961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는 전화벨 소리에 물기를 대충 닦고 수화기를 들었다
"에미야 대문에 쪽지가 끼어 있는데 소포가 왔다고 우체국에 와 찾아 가란다."
방금 다녀가신 친정엄마였다.
칠순 노모답지 않게 낭랑한 음성이 오늘따라 더욱 카랑카랑 하다.
"오늘은 늦었고 내일부터 추석연휴인데 어떻게 찾겠어요. 어디서 온 건데요?"
"글쎄다 그런 말은 없고 ..."
엄마는 몹시 조급하신 모양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미국에서 큰아들이 보내온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얼마전 국제전화를 받고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셨다.
 
 올 해 일흔 둘되신 엄마는 궁핍하긴 하여도 25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셨다.
7남매가 별탈없이 성장하여 제가끔 가정을 이루고나니 두분이서 푸성귀나 가꾸며 사시다가 4년전 아버지마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시자 내 집으로 엄마를 모셨다.
그러나 2년을 함께 사는동안 장모 사위간에 서로 너무 잘하려 애쓰다보니 그게 오히려 불편함이 되어 가까운 곳에 새로이 터전을 마련해 드렸다.
엄마는 하루 건너 한 번 꼴로 내 집에 들르시며 궂은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상의를 하셨다.
내일부터 명절연휴다.
명절 때가 되면 나는 큰며느리로서 시댁엘 가야하고 덩그마니 혼자서 차례상을 준비할 엄마를 생각하면 늘 바늘 하나를 삼키고 있는듯 가슴이 따끔거렸다.
저녘무렵 전화라도 드리면 맥풀린 음성이 더욱 짠하게 했다.그렇다고 아들이 없는것도 아니었다.
큰아들은 오래전부터 미국에 살았고 작은 아들은 결혼전인데다 직업상 명절아침 차례 참석이 고작이었다.
오빠와 난 열네살 터울이다.
딸 둘을 낳고 세번째 아들을 얻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으랴마는 그로인해 다소 과잉보호의 근성이 배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오빠를 잘 모른다.적잖은 나이 차이를 핑계로 차라리 무관심 하자는 속셈도 없지 않았다.
내가 아는 오빠는 다만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그래서 늘 어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면단위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등학교를 가지못했지만 검정고시를 패스하여 서울대에 당당히 합격한 수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가족은물론 동네사람들에게도 부러움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 터였다. 가끔은 절골마을 윤아무개 동생 아니냐며 알은체를 하면 나도모르게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논산 모중학교에서 교사를 하고있던 오빠는 첫 월급으로 17인치 흑백텔레비젼을 사가지고 왔다.
양 옆으로 문을 열면 차곡차곡 개어져 숨박꼭질하듯 숨어버리는 요술같은 두쪽의 문을 가진 텔레비젼이었다.
그 때만해도 텔레비젼은 동네에 서너대 있을 정도였고 모두 14인치에 불과했기에 커다란 자랑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그로인해 동생과 나는 오빠의 존재를 더욱더 우러러 보게 되었다.
그러한 오빠가 2년만에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이유는 대학 때 수술받은 척추디스크 후유증이라고 했다.
오빠는 건넌방에서 1년을 보냈다.
그 후 E제약회사에 수석으로 입사했으나 역시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오빠는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수석이나 차석으로.
그래서인지 2년을 넘기면 안된다는 자기만의 징크스라도 있는 듯 보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온 오빠는 언제나 수도승처럼 건넌방에 들어앉아 문밖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공부였다. 오빠가 은신하고 있는 건넌방에선 밤낮으로 혀꼬부라진 소리가 흘러나왔고 장엄한 클래식 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런 오빠를 보는 아버지 마음은 답답함이 가슴을 칠 노릇이었을게다.
입에 겨우 풀칠하는 살림에 대학까지 그것도 일류대를 나온 녀석이 툭하면 방구들을 지고 앉아 허리가 아프네, 등이 아프네, 공부를 더합네 해대니 복장 터질 노릇이 아니겠는가!
방황도 때가 있으려니 그래도 오빠를 믿고 기다려주는 건 엄마 뿐이었다.
뭔가 큰 사람이 되려고 그러는거라고 믿음에 찬 얼굴로 아버지를 설득시킨 것도 엄마였다.
그러나 대학원 수석 합격 특혜로 올림픽ㅇㅇ 위원회에 스카웃되어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던 오빠가 또다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귀향했을 때는 엄마마저도 말문을 닫아버리셨다.
그러던 오빠가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선언을 했다. 미국이민을 가겠다고.
미국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먼 산만 바라볼 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고 엄마는 연신 치마자락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그것이 아버지와 오빠의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상상조차 하고싶지 않은 일이었다.
가끔씩 오빠에게서 국제우편이 날아오고 언제나 잘사노라고 자랑이 늘어져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였다. 훗날 그것이 한낮 가족들을 배려한 과장의 몸짓임을 알기전까지는.
그러나 역시 난 오빠를 모른다.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오빠는 건넌방을 들락거렸고 오빠의 고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본적도 없다. 내가 감히 오빠를 이해한다거나 동정하려 했다면 오빠는 나를 강아지 바라보듯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참고 있던 화를 몰아 건넌방에 대고 소나기처럼 퍼부실 때도 오빠보다는 아버지가 더 측은하고 마음이 아린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음소식을 듣고뒤늦게  미국에서 오빠가 날아왔다.사십줄에 들어선 오빠는 중년의 티가 역력하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어 만나는 오빠역시 내겐 여전히 어려운 존재였다.
내가 초등학교시절 교사이던 오빠는 주말이면 거의 빠짐없이 집으로 달려왔다.
저녁을 먹고나면 일주일분 시험을 보았고 동생과 나는 틀린 갯수만큼 이를 옥문채 뺨을 맞기도 하고 참나무 몽둥이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그 때부터 오빠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흙이 덜 마른 봉분을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어대는 오빠는 아버지에게 험한 소리를 듣던 그 시절로 돌아가 모든 용서를 비는 듯했다.
며칠간 내 집에 머무는동안 술힘을 빌어 그간 생활을 털어놓기도하고 장남노릇 대신해주는 남편과 나의 손을 잡고 몇번이고 미안하고 고맙다며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오빠가 미국으로 돌아간지 어느덧 4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쯤 전화벨이 울려 받으니 오빠였다.
''은숙아 나야 오빠야"
국제선을 타고 흐르는 다소 들뜬 음성은 순간 불안함이 엄습하며 목소리마저 떨려나왔다.
", 오빠 잘 지내시죠? 건강은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왼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오빠는 미국에서 한의원을 개원하였고 중국인 의사2명 약사1명 오빠는 원장겸 원무전담자라며 어린아이처럼 목소리톤을 한껏 올려 자랑을 실었다.
순간 나도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어릴적 생솔가지 타는 연기를 들이마셨을 때처럼.
그것이 꼭 성공을 의미해서가 아니었다. 10여 년 동안 타국에서 비틀거리던 오빠에게 비로소 튼튼한 울타리가 놓여진 것처럼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오빠로인해 늘 주눅들어하던 엄마도 조금은 어깨를 펼 수 있음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겨우 건네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어머니는 우체국에 들러 누런 박스를 끌어안고 나에게 오셨다.
박스에는 알파벳이 즐비했고 엄마 이름 석자가 큼직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박스를 열어보니 하얀 종이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한의원 하는 아들이 어머니께 보내드리는 보약입니다'
엄마는 약을 몹시 싫어 하셨다. 더군다나 한약은 냄새가 역하다며 칠십평생 드셔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였다.
그런 엄마가 다음날 약을 한 첩 달여드시고 오셔서는 얼굴을 붉혀가며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얘 약이 어쩜 그리 순히고 구수하다니, 세어보니 종류가 열한가지나 되더구나!"
"그래요? 아무렴 제일 좋은 상품으로 보냈겠지요 아들이 보낸건데"하며 맞장구를 쳐드렸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얼마나 오랜만에 받아보는 효도인데 가슴이 벅차지 않으시겠는가!
나는 눈가의 축축한 습기를 들키지 않으려고 딴청을 떨며 기저귀를 개는척 했다.
오빠의 오랜 방황은 어쩌면 엄마의 태몽때문인지도 모른다.
삼신할머니가 꿈에 나타나 어머니에게 검은 실타래와 흰 실타래를 내밀며 고르라기에 검은 실타래를 잡았다한다. 그로인해 오빠의 인생이 어둑하고 매사 힘이들 뿐 잘 풀리지 않는가보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나는 문득 오빠가 보고 싶어졌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오빠가 어려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싶다.
언젠가 오빠가 다시 한국을 찾을때면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빠 비록 검은 실타래라 하더라도 언젠가 끝은 드러내지 않겠어요 용기를 내세요"라고.

박병환   15-07-06 11:55
    
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작고한 박상규의 "역마살"이란 노래가 떠오르는군요. 전형적인 6~70년대 우리나라 가정을 보는 것 같고 그중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아들 때문에 먼 산만 바라다봐야 하는 식구들을 생각하면 애잔하기도 합니다. 오빠도 그 시대에(젊은 시절 포함)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식구들도 또한 세상의 바퀴 속에서 분명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세월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더께를 켜켜이 쌓아 서로가 중년이 된 지금 그렇게 분명했던 이유는 너그러운 이유로 화해져 다른 결의 먼 산을 보게 하지요.
'인생'이란 자서전적 소설을 읽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더욱 공감이 갑니다. 이야기를 차분하게 전개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  "오빠 비록 검은 실타래라 하더라도 언젠가 끝은 드러내지 않겠어요. 용기를 내세요."라고 표현이 좋습니다. 이렇게 수필은 독자에게 무언가 울림을 주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다만, 수필 공모이므로 글을 문단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윤은숙   15-07-07 16:43
    
선생님 감사합니다. 미흡한 글을 읽어 주시고 평까지 남겨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욱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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