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얕은 야산과 구릉지여서 야생동물과 자주 마주친다.
오늘도 고라니가 무리를 지어 여유롭게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고라니 출몰은 너무 일상화되어 이젠 놀라울 일도 아니다. 예전에는 고라니가 인기척만 나도 꽁무니가 빠지게 사력을 다해 달아나니, 한번 뛰면 3~4m를 뛰며 원만한 도랑과 골짜기를 단숨에 뛰어넘어 화살같이 달아났었다. 사람을 피해 멀리 산속에서 칡넝쿨을 뜯어 먹고 살던 녀석이 요즘은 무리를 이끌고 인가 근처로 출몰하고 있다.
요즘의 고라니는 사람을 보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귀를 쫑긋 세우고 가만히 서서 빤히 쳐다본다. 한두 마리가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몇 마리가 엉거주춤 해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빤히 쳐다본다.
“저 녀석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유분수지.”라며 돌멩이를 힘껏 던져 보지만 고라니들은 껑충껑충 뛰다가 달아난다.
지난여름 아내가 메주콩이라도 한다고 밭에 콩을 심었지만 고라니 녀석이 하나도 남기지 않아 헛농사를 지었다. 아내는 고라니에 대해 원한이 많았다.
어제 뉴스에서 멧돼지가 식당에 난입해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손님들이 대피하는 소동을 화면으로 보았다. 멧돼지가 출몰하면 토네이도가 지나간 것처럼 초토화된다.
멧돼지는 항상 다니는 길로 다니는 습성이 있어 예전에는 사냥꾼들이 올무를 놓아 멧돼지를 잡았지만 지금은 개체 수가 많아서인지 무법자처럼 아무 곳이나 휩쓸고 다닌다. 고구마밭이나 옥수수밭은 멧돼지의 좋은 먹잇감이어서 이들이 한번 지나간 곳은 완전히 빈 밭이며, 모든 것을 깨끗이 먹어 치운다.
배를 채운 멧돼지는 그래도 주둥이가 근질거리는지 근처 묘소에 있는 상석을 지근지근하더니 저만치 밀어 놓고 봉분을 후비기 시작한다. 끝내 유골까지 훼손한 멧돼지의 만행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난장판이 돼 버린 묘소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자손들은 급기야는 레미콘으로 봉분과 상석 사성 등 묘소 전체를 덮어 버리고 만다.
전에는 수렵 기간을 정해주고 엽사의 사냥을 허용했었는데 이마저도 없어졌나? 야생동물과의 평화는 깨졌고 전쟁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야생동물의 지원군인 행정규제가 만만치 않아 이길 것 같지는 않다.
아들이 심어 놓은 호두나무가 이젠 제법 커서 3년 전부터 호두가 열리기 시작했다. 호두를 따서 싹싹 모래에 비벼 물로 닦고, 햇볕에 말려 놓으니 뽀얗고 예뻤으며, 내년에는 호두축제를 하자며 손녀가 들떠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청설모 한 마리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쪼르르 와서 나무에 오르더니 호두 한 개를 따가지고 물고 갔다.
“자연의 산물은 같이 나누어 먹는 거여.”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다음날 청설모 세 마리가 연신 호두를 따고 두 마리는 어디론지 물어 나른다. 화들짝 놀라 놈들을 쫓아 보내고 나무에 기어오르지 못하게 PVC판을 둘러매어 놓았다. 이 정도면 제아무리 청설모라도 별수 없겠지 하고 태연히 있었는데 아뿔싸!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청설모는 옆 나무로 올라가 솜방망이처럼 부풀린 꼬리가 낙하산이 되어 호두나무로 날아든다. 결국, 호두를 모두 청설모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생존에 관한 한 신(神)은 공평하게 권능을 주신 모양이다. 모든 생명체에게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초능력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힘을 주신 것이 분명하니, 사람인들 청설모에게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아침에 도로에 나가면 간밤의 로드킬 현장을 자주 접하게 되며, 끔찍하고 참혹한 야생동물의 사체를 차바퀴로 지날 때면 섬뜩해진다. 무방비 상태인 고라니나 오소리 등 야생동물들은 차량의 라이트에 눈이 부셔서 꼼짝도 못 하고 비명횡사한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개체 수만 많으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나는 생태계 다양성 신봉자이다. 생태계의 한 축이 무너지면 그 피해는 결국은 사람에게 온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황소개구리 울음소리를 혐오했고, 저수지의 질서를 망가트리는 메기와 가물치를 열심히 먹어 주었다. 그렇다. 개체 수가 문제이다. 어느 한쪽이 너무 많으니 탈이다.
사람의 숫자는 자꾸 줄어들어 마을에서도 빈집이 자꾸 늘고, 빈집에는 오소리와 너구리 똥이 소복하니 소름이 돋는다.
우리 인간도 생태계의 일원인데 이를 무시하고 신(神)이라도 되는 양 건방을 떠는데, 생태계의 조절은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옳다고 본다.
먹이 사슬의 고리가 이를 조절하고, 기후가 조절하며, 천재지변이 이를 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남획이 문제이며, 생태계를 자연에 맡겨 놓으면 야생동물인 고라니나 멧돼지같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우쳐 창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자만심이 부메랑이 되어 야생동물로부터 역습을 받을까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