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동전 모으기
며칠 전 유난히 눈에 띄는 뉴스가 눈길을 끌더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재래식 시장 입구에서 자판을 깔고 행상을 하던 할머니가 수년 동안 모아온 동전함을 기부한 것이다. 비록 그 액수는 많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훈훈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본디 동전은 앞면과 뒷면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번에는 삼백만 원짜리 관상용 새우를 잃어버렸다가 다른 동호인들의 수족관에서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우리를 쓸쓸하게 해주는 것 같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빈부 격차의 한 단면을 고수란 리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본래 동전이 그 모습을 보인 것은 고려 시대 건원중보라는 주화(鑄貨)이다. 당시에는 주화(鑄貨)를 구성하는 금속에 상당하는 가치를 가져 서로 다른 금속을 사용하는 주화 간의 교환비가 유동적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주화를 구성하는 금속의 가치가 주화가 나타내는 가치보다 높거나 낮을 수 있었다. 반면에, 현재의 주화는 그 가치가 공권력에 의해 보증되어 있다. 언젠가는 시간이 흘러간 사이 동전이 학생들과 직장인들에 의해서 출퇴근 시에 요긴하게 사용됨으로써 그 귀중함이 빛났었다. 그 시절 버스 안내양에게 건네주었던 동전에 대한 추억은 아련하게 남아 있는게 사실이다. 아무튼, 동전은 근검절약의 상징이요 개발과 성장이 주된 흐름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시대의 정신적인 상징물이라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동전을 자주 사용했었던 사라진 또 다른 추억 속 장면이 있다. 공중전화가 사라진 우리들의 통신문화의 변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의 변화를 알려주는 요긴한 통신수단의 이용에도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 동전이었다. 요즈음 거리에 간혹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에도 어느새 그 옛날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심지어 기대고 서서 모바일 폰을 사용하는 남학생들의 등받이로 전락해 버린 공중전화 박스이다. 이런 모습 속에서 격세지감(隔世之感)과 함께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근대 문화가 시작된 이래로 우리 주변의 환경변화는 분초(分秒)를 다투고 있는게 사실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세대의 변화는 불어오는 바람에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밀려오는 물결 속의 파고(波高)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과거의 사실을 기록 속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고, 기존의 현실은 또다시 동일한 절차를 반복할 것이라는 사실에서 알수 있다. 아울러 미래의 새로운 문명의 이기(利器)는 새로운 바람을 거세게 몰고 오지 않겠는가? 호숫가의 출렁이는 물결이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세대변화와 문명의 이기(利器)가 몰고 오는 환경의 변화로 대가족보다는 핵가족세대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 쓸쓸하게 하고 있다. 그 결과 전체적인 권익보호(權益保護)보다는 개인적인 이기주의(利己主義)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러한 점으로 인해서 어느새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그 옛날 선조들이 정해놓은 개국국시(開國國是)는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로지 잘살아 보세라는 말이 개국이념(開國理念)으로 새로이 등장한 쓸쓸함이 존재하고 있는 듯하니 안타까움이 더하는 것 같다. 아무리 집단적인 이기주의와 편리함이 우리 마음의 한가운데를 차지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할머니가 동전을 모아서 기부한 마음과 같이 우리 모두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성으로 모아서 알뜰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만큼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저금통 속에 동전이 모여지듯이 오늘도 이러한 마음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