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추수가 얼마 남지 않은 논 위의 해질녘 노을이 가을 속으로 스며들고 한 여인의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생이 희미한 선홍빛으로 물들어 간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자동차 한대가 오늘과 내일사이의 정적을 가르며 주차장에 멈췄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가 내게 다가왔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예산 역 근처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사촌누나가 먼저 우리를 맞이했다.
어느 해 여름휴가를 다녀오는 길목에서 잠시 큰 어머니를 찾아 뵌 적이 있다. 어릴 적 방학이 되면 시골 큰집에 내려가 며칠을 머물다가 왔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인사드리러 방문 한다는 것은 틀에 맞춰 돌아가는 도시의 생활 속에서 쉽지 않았다.
핵가족이라는 명분아래 길을 지나다가 서로 왕래가 없고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않는다면 가까운 사촌 지간이라 할지라도 무심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큰어머니는 나를 보자 “ 뉘여 뉘여 ” 하셨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도 있지만 여든이 넘으신 큰 어머니의 기억 속에는 처마 끝에 매달린 투명한 고드름을 한입 깨어 물고 입안에서 우물우물 거리던 나에게 이웃집 마실을 다녀오시다가 따끈따끈함이 식을 새라 품안에 넣어 오신 큼직한 속살이 노란 고구마 하나를 건네받고 빙그레 웃음 짓던 어린 조카의 모습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저예요 저.. 세규예요. 으응.. 누구.. " 기억의 저편에서 아무리 불러내려 해도 큰어머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셨다. 사촌 형수님은 얼마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셔서 가끔은 온전한 정신이지만 손주와 가족들도 알아보시지 못한다고 했다.
큰 사촌형은 얼마 전 마당이 넓고 무쇠 가마솥이 두개나 있던 아궁이를 간직한 부엌이 있는 시골집을 수세식 화장실에 메이커 두 글자가 선명히 새겨진 싱크대가 딸린 집으로 신축을 했다. 남향의 거실에 걸려있는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 속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큰 어머니는 아들 셋에 마흔이 넘어 얻은 늦둥이 딸을 키우셨다. 사촌누나는 초등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의 엄마는 젊은데 우리 엄마만 늙었다고 학교에 오지 말라고 투정을 부렸다 한다. 철없던 시절 아무 생각 없이 큰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살아생전 어머니께‘ 좀 더 잘해 드릴 것을 ’하는 후회만이 남는다며 누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가을밤 영안실 앞 화단의 고즈넉한 풀벌레 소리는 달빛과 어우러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들려왔다.
예상 했던 대로 둘째 사촌 형이 보이지 않았다.그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 했다. 어려운 살림에 농사를 지으며 큰아버지는 논과 소를 팔아 대학등록금을 마련해 형의 뒷바라지를 했다. 둘째 형은 여름 방학 때면 책값이라도 번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을 돌면서 kg 당 가격을 매겨 사들여 일본에 수출한다던 미꾸라지를 나와 함께 잡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자동차 회사인 H 기업에 입사를 했고 과장까지 진급을 했다. 언젠가는 결혼을 한다고 깔끔한 정장에 흰색 소나타를 몰고 작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다며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촌형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니고 처가집도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한 가정의 남편과 아빠로서 가족과 같이 게으른 일요일 오후의 시간을 TV와 함께 보내는 것도 행복의 일부이건만 그는 잘 다니던 회사를 사업을 해보겠다며 그만 두었다.
내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한달 후 돈이 들어온다며 큰 금액이지만 이자는 넉넉히 드릴 테니 천만원정도 융통 할 곳이 없느냐는 사촌형의 전화를 받았다. 마침 어머니 친구 분 중에 여유가 있는 분이 계셨고 시중 은행보다 조금 더 많은 이자를 주겠다고 하니 어머니와 이십 년 지기 친구는 어머니를 믿고 사촌 형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 이었다. 결국 한달 후 돌려준다던 천 만 원은 그가 경영하던 회사의 부도와 함께 언제 받을지 모르는 답답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친구를 믿고 돈을 빌려 주었지만 받을 방법이 없자 이십년의 우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사촌 형과 친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셨다.
친구들이 대학교 4년을 다닐 때 나는 군 입대를 하기 전 까지 사회 경험을 해본다며 많은 일을 했다. 건설 현장에서 하루 종일 허드렛일을 하며 새까맣게 탄 얼굴로 지냈고 한 여름 경마장에서 둘리 인형 탈을 쓰고 온몸을 땀에 적셔도 보았고 우비 만드는 공장과 대형 식당에서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하면서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한번은 편의점에서 일을 할 때 2만원이 금고에서 사라졌다며 오해를 받아 쫓겨난 적도 있었다. 부지런히 살았고 부지런히 벌었다. 친구들이 자주 가던 당구장도 가지 않았고 담배조차도 피우지 않으며 제법 큰돈을 모았다.
결국 어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사촌형이 빌려간 돈을 돌려 줄 거라 생각하신 나머지 내가 모아둔 천만 원 을 친구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날이후 사촌 형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다. 돈을 빌렸을 때 차용증을 쓴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천만 원을 작은 엄마가 대신 갚아주었느냐며 그는 오히려 화를 냈다.
이십년 지기 친구와의 우정은 금이 갔고 대신 갚아준 돈은 ' 아들이 몇 년을 어떻게 해서 모은 돈 천만 원인데 ' 빌려달라고 사정사정 할 때는 언제이고 인간관계의 감정 따위는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여기며 법을 운운하는 사촌 형에게 어머니는 믿었던 사람의 실망과 배신감으로 인해 없으셨던 고혈압과 울화병이라는 지병을 앓게 되셨다.
군대를 제대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전후 사정의 설명을 들었다. 친인척간의 왕래를 끊고 사는 그를( 나중에 알고 보니 형제지간 과 집안 어른들께도 50만원 30만원 자잘한 돈을 빌려가고는 갚지 않았다.) 겨우 수소문해서 어머니와 함께 만났다. 사촌 형은 작은 엄마도 엄마라며 안 갚아도 된다는 억지를 부리고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거라며 서로 의절하자고 했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졌다.
큰어머니의 발인이 내일이었다. 하지만 둘째 사촌형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연락 할 길이 없으니 안타까웠다. 나는 친인척간의 돈거래로 인한 불편함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우선 그에게 ‘ 큰어머니의 부음을 알릴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혹시 지금 살고 있는 주소라도 알 수는 없는지 사촌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혹시나 큰어머니가 돌아가실 것을 대비해서 주민등록 초본을 6개월 전에 준비 해두었다고 했다. 초본에는 그의 주소가 나와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큰어머니의 장례에 주소는 알고 있지만 전화번호를 모르니 연락할 길이 없었다.
다음지도에 주소를 넣고 로드뷰를 검색했다. 골목골목 실제 차량이 이동을 하면서 찍어놓은 사진과 같은 지도를 보고 사촌형이 살고 있는 주소의 건물을 유심히 보니 2층은 가정집 이고 1층은 옷가게였다. 옷가게의 간판에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보였고 일단 전화를 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전화 시도에도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진을 찍은 업데이트 날짜를 보니 3년 전의 로드뷰 이었다.
주민등록 초본에 적혀 있는 주소지 관할의 파출소에 연락을 했다. 집안 사정을 얘기 하자 경찰관 한분을 보내어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전해 준다고 했고 내 전화번호와 이름을 남겼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낮선 전화번호가 영상에 떠올랐다. 전화기 건너 들려오는 사촌형의 목소리는 약간의 흐느낌이 섞여 들려왔고 장례식장을 물었다.
영안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무렵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순간 큰어머니의 영정사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십년 만에 그를 만났다. 억지를 부리고 더 이상 보지 말고 의절 하자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께도 말씀드렸고 돈을 받겠다는 생각은 그때 이후 하지 않았다.
사촌 형은 내게 연락을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형이 대학교 다닐때 미꾸라지를 함께 잡던 일들이 생각나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