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바라볼 때면.
임 세규
어떤 사물이나 풍경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가 문득 바라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내게는 남산이 있다. 퇴근길, 남산이 노을에 물들어 간다. 남산은 든든한 울타리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남산 밑 용산구 후암동에는 신체검사를 하는 서울 지방 병무청이 있었다. 1994년 그해 여름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과 키. 몸무게. 시력등 기본적인 건강 검진과 설문지를 받고 현역병 판정을 받았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장소와 언제쯤 끝날 것 같은지를 물으셨다. ''후암동이고 오전이면 될 것 같아요.'' 라고 말씀 드렸다. 철부지 같던 아들이 군대를 간다고 하니 대견 하셨던 모양이다. ''오후 1시쯤 점심을 같이 먹자 '' 하셨다. 식사 후 아버지와 함께 남산을 올랐다. 평일 오후의 남산은 고즈넉했다. 쏟아지는 햇살이 매미 소리와 함께 힘껏 성을 내며 여름의 절정을 알렸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와 나, 누이, 셋이서 남산을 올랐다. 끝도 없을 것 같은 계단을 오르며 진심 반 꾀병 반으로 투덜거렸다. 아버지는 나를 업은 채 한 손으로 누이의 손을 잡고 남산을 올랐다. 정상에 도달 했다. "구구구" 살이 통통한 비둘기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팔각정위에 걸터앉아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스 께끼. 아이스 께끼." 빛 바랜 군복 상의를 입고 한쪽 팔에 갈고리가 보이는 상이군인 아저씨가 하얀색 Ice box를 어깨에 걸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누이와 내게 아이스 께끼를 하나씩 손에 쥐어 주셨다.
파란 하늘과 플라타너스 나무가 내어주는 그늘이 어우러진 오후였다. 잠시 남산 중턱 벤치 위에 앉았다. 아버지는 군대 생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수시로 밥을 굶던 시절이라 군대에서 삼시 세끼 주던 밥은 그나마 배를 곯지 않으셨다 했다. 식사를 할 때는 매번 큰소리로 "감사히 먹겠습니다." 라는 구호와 함께 밥과 반찬을 먹을 때도 90도 직각으로 먹어야 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전우들과 함께 산을 넘고 지게로 자재를 운반해서 예전의 G.O.P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그곳은 북한을 바로 눈앞에 둔 최전방 이라 지금도 군 생활을 하기에 힘든 곳이다. 스마트 폰을 허용하는 것까지 시범운영 한다고 하는 지금의 군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 하신 것 같다.
바람이 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 위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남산 중턱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만난 이야기, 누이와 내가 태어나던 날, 고열에 시달리는 나를 안고 잠 못 드셨던 밤. 남산을 오르며 아버지와 참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덧 남산 정상에 다다르자 팔각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원한 바람이 1982년의 여름을 부른다. 기억속의 화면에 누이와 내가 아이스 께끼를 들고 계단 위에 앉아있다.
남산 타워에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시간이 잠시 멈춘 듯 보였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간간히 움직이는 작은 차들로 인해 아무 일도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체검사를 받고 얼마 후 입대를 했다. 상병 계급장을 달았을 때였다. 긴박한 싸이 렌 소리와 전투준비태세 훈련의 열기가 식어갔다. 흙먼지가 흩날리는 연병장의 긴장감이 무장 해제될 무렵이었다. 부대 입구 초소에서 아버지가 오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색이바랜 남루한 작업복을 입고 계셨다. 철원 근처에 일이 있어 왔다가 불현듯 아들 보고 싶어 그냥 오셨다고 했다. 그날 새까만 군인 아들 손에 쥐여 주셨던 돈 3만원에는 당신의 묵묵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제대 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토요일 오후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 창문 너머에 아버지가 있었다. 머리위에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쓰신 아버지는 배달할 무거운 짐을 자전거에 싣고 계셨다. 버스에서 내려 한걸음에 달려갔다. 조금이나마 도와드리려 했지만 아버지는 손을 내저으시며 ''어여 가. 어여 가.'' 하셨다. 그 순간 아버지의 눈과 마주쳤다. 피곤한 기색이 여력 한, 삶의 고단함이 묻어난 충혈 된 눈, 아들에게 차마 보이고 싶지 않으셨던 모습의 눈, 짐을 싣고 배달을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니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공무원 시험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였다. 아버지께 제일 먼저 전화를 했다. '' 이젠 됐다. 축하한다.'' 당신의 목소리에 작고 여린 글썽거림이 들려왔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있다. 6.25이후로 파독광부와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 찾기 등 한 인물을 통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이야기한 영화다. 가난했던 시절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오신 부모님 세대의 삶이 담겨 있다. 아버지는 그 영화 속의 시대를 살아오신 분이다. 중동근로자로 6년을 넘게 사우디에 계셨다. 가족을 두고 이국땅에서 사막의 열기를 견뎌야 했던 당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가 중학생이 되어 김포 공항에서 귀국하신 아버지의 손을 잡았을 때 낯설었다.
우리네 아버지 세대가 그렇듯이 앞만 보고 달려오신 당신의 삶에는 여유가 없다. 아마도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다. 사랑 표현에 인색하시다. 아니 어색 하신 것일 게다. 1994년 여름 어느새 다 자라 성인이 된 아들과 함께 남산에 오르셨던 아버지는 내게 당신의 사랑을 표현 하신 것이다.
해질녘, 남산이 은은한 미소의 노을과 함께 서울 하늘을 지긋이 바라본다. 남산타워는 늘 곧은 아버지와 같다. 남산의 푸르름은 성실하고 듬직한 아버지의 청춘을 닮아있다. 남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아버지는 그렇게 언제나 한곳에서 아들을 바라보고 계신다.
시원하게 솟구치는 분수대 뒤로 남산이 보인다. 시야가 트인 서울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남산을 바라볼 때면 지금의 내 나이와 같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이번 주말에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남산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