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 세끼
보리가 쑥쑥 자라 밭을 온통 덥고 파란 자태의 몸이 바람결에 따라 넘실거리면 요즘 사람들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에는 ‘보릿고개’라는 말을 썼다. 겨우내 아껴먹던 식량이 바닥나고 보리가 익기 전 시기.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때를 일컫는 단어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삼시 세끼 잘 먹는 것도 복’이라는 말씀을 종종 하실 정도로 우리는 가난했고 배고팠다.
우리에게는 흘러간 이야기가 되었지만, 식량 걱정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나는 이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삼시 세끼를 걱정하지 않도록 도와는 일을 했었다.
2016년 여름, 나는 예전 김포공항을 떠오르게 하는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의 와가두구(Ouagadougou)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장마와도 같이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우기(雨期)에 도착했던지라, 공기가 습해 몸은 땀으로 후줄근 젖어 들었다. 마중 나온 현지 스텝의 차를 얻어 타고 공항에서 호텔을 이동하면서 본 광경은 가난이었다.
출장을 떠나기 전 동료들이, 부르키나파소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지만 테러가 빈번하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예약된 호텔에 도착하고 보니 담은 꽤 높았고 육중한 철문을 통과해야 호텔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철문 앞에는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지키고 있어 수도인 와가두구도 테러리스트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 실감 났다. 몸이 움츠러들고 긴장이 더 해졌다.
객실에 올라가 샤워기를 트니 염소 냄새가 물씬 나는 물이 쏟아져 내렸다. 수돗물 사정이 좋지 않아 호텔에서 별도로 소독을 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양치질을 위해 준비해간 물 소독제를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출장지에서 오염된 물 때문에 콜레라와 같은 질병에 걸릴 수도 있어 매사가 조심스럽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샤워를 마친 후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일찍부터 출발하는 이유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뿐더러, 목적하는 마을에는 일행이 묶을 만한 숙박시설이 없어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테러가 상존하는 나라에서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돌아다니기는 위험했다.
수도인 와가두구를 벗어나자 그나마 보였던 복층 건물은 사라지고 토벽을 쌓아 올린 단층 건물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돌과 진흙으로 벽을 쌓고 나무와 짚을 엮어서 만든 지붕을 올린 집과 지붕 없이 벽만 있는 집들이었다.
비가 한창 오는 우기인데도 지붕이 없는 집들이 적지 않아 놀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집 내부에는 비닐과 나무를 덧대어 엉성하게 지붕을 만들어 놓았고, 그 주변에는 영양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듯 보이는 마른 체구의 사람들이 있었다. 지붕 없는 집은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났고 이는 나라 전체에 퍼져있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에서도 지붕 없는 집들이 간간이 있으나, 부르키나파소와 같이 많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에서도 최빈국(最貧國)에 속한다는 부르키나파소의 실상이었다.
목적지에 중간쯤 갔을 무렵 오토바이 부대를 만났다. 오토바이에 탄 사람들은 모두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수시로 발생하는 테러로 이름이 알려진 나라인지라 혹시나 테러 집단인가 싶어 겁이 덜컥 났다. 다행히 오토바이 부대는 반대편 차선에서 우리 차량을 스치듯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운전사도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이들은 정부의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을 스스로 방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시골에는 정부의 치안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안한 지역에서의 프로젝트 진행은 쉽지 않기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이어졌다. 빨간색 흙길인데 물 빠짐이 좋은지 우기임에도 땅이 단단하여 큰 요동은 없었다. 대략 한 시간을 더 달리자 높은 토담이 보였다. 토담은 방벽처럼 내부를 보호하는 듯했다. 토담 안에는 돌과 주황색 진흙으로 네모지게 벽을 쌓아 올린 후 볏짚을 엮어 지붕을 덮은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언 듯 보면 축소한 성곽과도 같은 모습인데 이 지역 부족의 전통 가옥 형태로, 여러 세대의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일행을 태운 차는 토담 입구 앞에 정차했다.
잠시 후 쌀농사를 짓는 농부가 나와서 일행을 반겼다. 그는 이 나라의 공식어인 프랑스어를 못했다. 배울 기회가 부족한 시골에서는 부족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르키나파소만 해도 스물일곱 개의 대(大) 부족(部族)이 있어 다른 부족 사람끼리 만나면 말이 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식량 생산을 늘릴 수 있게 교육을 해야 하나, 부족어만 아는 농부들을 모아 놓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일 부족으로만 구성된 지역이라면 그나마 수월하지만 여러 부족 출신을 한 자리에 모아 놓으면 통역이 문제가 되어 제대로 교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농부는 현지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아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논으로 나를 안내 했다. 우리나라 논 같이 네모반듯한 논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획을 가지런히 나누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논을 보여주면서 자신만큼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하여 농사를 짓다 보니 가뭄이라도 들면 온 가족이 배를 곯아야 했다.
게다가 쌀 종자도 좋지 않았고 재배하는 방법도 전통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쌀 소출이 높을 수가 없었다. 좋은 종자로 바꾸어 주고, 쌀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재배 방법을 가르쳐 주면 생산량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프로젝트가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이 농부와 그의 가족들은 적어도 배고픔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장 조사를 마무리하고 그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작은 도시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이십여 명의 농부 연합회 대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이 이들 중 절반이 넘었는데 아프리카에서는 여성이 쌀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지역 교육센터에 모여 있는 농부 연합회 대표들은 대부분 비만한 몸에 배가 나온 소위 ‘배사장’들로 부르키나파소 거리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허름하고 홀쭉한 서민하고는 달랐다. 가난한 나라에서 농업은 중추가 되는 산업이다 보니 넓은 농지를 가진 농부는 지역의 유지였다. 그리고 배고픈 나라에서는 넉넉하게 살이 붙은 것이 부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식량을 넉넉히 생산하지 못하는 농부를 도와주거나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넓은 농토에서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해서 곡식 가격을 내리는 일이 근본적으로 식량난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서민들이 낮은 가격으로 식량을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넓은 농토를 가지거나, 지역에서 힘이 있는 ‘배사장’님과 같이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농부 연합회 대표들은 쌀 소출을 높일 방법을 나에게 물어왔다. 그리고 자신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곳에 오기 전 만났던 농부의 농사 방법과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우리나라 쌀농사 방법만 가르쳐주어도 이들의 쌀 생산이 바로 늘어날 수 있었다. 이 나라에 사는 많은 이들이 겪는 굶주림을 덜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일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삼삼오오 떼 지어 다니는 아이들의 옷은 낡았지만, 표정은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난하지만 긍정적이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들이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보았고, 이 나라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출장을 마무리하고 출국을 위해 비행장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모든 일이 잘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르키나파소를 떠나면서부터 모든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3년이란 시간을 소요하면서 현지 스텝의 도움으로 얼추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으나, 처음 기대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국민이 성실해도 나라가 불안하면 가난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로 인한 가난함이다. 부르키나파소. 언제고 다시 가고 싶은 나라이다. 그때는 지붕 없는 집들이 적어지고 사람들이 삼시 세끼를 거르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