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고 한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전 어느때쯤 난 가슴아픈 꾸지람을
들었다.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섭섭하다고 하시면서 날 꾸짖으셨다.아버지와
나사이의 건드리기 어려운 덩어리는 손도 못댄채 그대로
끝나고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세상을 뜨시면서 어린동생들을 잘
키워달라고 어머니께 부탁하셨다고 한다.나의
가슴속, 쑥스럽고 아릿한 덩어리에 아버지의 유언이
남모르게 새겨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어머니는 또 몇해를 밥장사,술장사를
하셨다. 그리곤 어느해인가
접었다.몸이 더이상
뒷받침을 못하신탓이라 생각한다.
나는 어머님 장사를 도운적이 없지만 먼 발치에서
본 기억은 있다. 부산의
큰 도매시장 부전시장에서 이런저런 반찬거리를
양철다라이에 가득 사서 머리에 이고 오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몇번있다. 그리고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흔들거리는 버스속에서 그
양철다라이속에 담긴 장사재료들이 엎어질까 떠안고
버스바닥에 앉아계신 모습도 본적이 있다.
장사는 중노동이다.
시장봐오기,그
재료들을 손질해서 음식,반찬,안주만들기,먹고난후
뒷정리까지 모든 과정을 거의 어머니 혼자서 해오셨으니
몸이 여기저기 아프지 않을수가 없었을것이다.
자식들이 무얼 알리?!
이제 우리가 여기저기 몸이 아프니 어머니고생을
짐작해 보는 것이다.
나는 야간중학BBS를
나온후 집에서 빈둥이며 노는 신세가 되었다.
무인가 학교라서 일반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면
검정고시를 통과해야하는데 야간 중학교 시절의
학업성적은 도무지 그런것이 못되었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가는 모습이 날 자극하기도 했고,학교에
가서 알찬 뭔가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일년 독서실에 틀어박혀 맹공부 독학을
한후, 나는 부산에서는
알아준다는 부산여상에 입학했다.
나의 고등학교 진학은 어머니에게 큰 기쁨이었고,
희망이었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기쁨과 희망이 되지못했다.
사춘기라는 엄청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1때까지
모범적으로 보냈다.
선생님들께서도 관심을 기울여 주신결과,상업학교이지만
진로를 바꾸어 대학가는 반으로 바꾸었다.
이시절부터 길없는 사춘기의 터널속을 지나게
되었다. 답도 없는
인생의 고민은 왜그리 질기고도 질긴지...그러다가
결국 학교 다녀도 배울게 없다고 건방진 소리하며
내멋대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한달쯤 학교를 가지 않았을까?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집으로 날 찾아오시고
타이르고 하시는한편,
학교측엔 적당하게 대처해놓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님이셨는데 덤덤하게
날 보시는 그눈길속에 무뚝뚝한 제자사랑이 느껴졌다.
학교 안간본들 내가
무슨 뽀쪽한 수가 있나?
학교에도 답이 없고,
학교아닌곳에도 답이 없고 혼자서 진창 고생해야
하는 시기인걸...
그때 그 방황하던
시절에 그렇게 붙잡아 주신 선생님덕분에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생각한다.
돌아보건데 선생님덕은
내가 있는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못찾아 어찌해야 모를때마다 날 잡아 이끄신것은
선생님의 손길이라는 생각이 든다.은사님을
찾아 감사 인사해야하는데...하는
어머니 말이 울퉁불퉁 했던 내 학창시절 밑바탕에
깔려있다.
상업학교를 대학진학반에서
그렇게 사춘기 방황하며 공부도안하고 보내며 졸업하니
또 제대로 취업이 안되었다.
다시 공부하여 대학가겠다고 학원을 들락이기도
하고, 독학을 해보기도
하고, 돈이 없어 집근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처럼 일하기도 하고 불안정했다.
어머니도 속이 탔다.
경제력이 있으면 뒷받침을 해주련만 그렇게도
못하는 현실과 딸 사이에서 안절부절 하시는듯
했다.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가 아시는분을 통해 관광회사에 날 취업시켜주었다.
어려운 우리집안에 돈이 돌기 시작햇다.
돈은 돌고 삶은 이어져
갔다. 그러나 돈은
모이지 않았다.
장사에 속 썩고 몸
힘들어져 가는 어머니,어린
동생들...우리집안은
살길을 다시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