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
신문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은 언제 봐도 따스한 감동을 준다. 특히 주인공 마리아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 (“My Favorite Things”)을 부를 때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내는 순수한 감성에 감탄하게 된다. 천둥 번개가 들이치던 어느 날 밤 폰 트랩 대령의 어린 자녀들이 무서워 떨며 가정교사인 마리아의 방에 하나둘 모여든다. 이들의 두려움을 달래주고자 마리아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할지 얘기해 준다. 자신이 힘들 때는 “푸른 초원과 별들이 총총한 하늘”처럼 멋진 것들을 떠올린다고 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장미 잎에 앉은 빗방울, 새끼 고양이의 수염, 반짝이는 구리 주전자, 양모로 짠 따뜻한 손모아장갑, 갈색 종이로 싸서 끈으로 묶은 소포 상자.” 마리아가 좋아하는 것들은 여기에다 아홉 가지나 더 있는데 슬플 때 이것들을 떠올리면 슬픔이 덜어진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시간에 쫓기면서 늘 긴장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마리아같이 아기자기하고 여유로운 태도가 무척 부럽다. 주로 “해야 하는 것들”에 매달려 살았지 “좋아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은 관심 밖이었다. 마리아가 부른 노래를 듣고 나 자신을 돌아보니 내게도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집 근처 광안리 바다와 인근 들판에서 주로 보냈다. 동생들과 바닷물 속에서 놀기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거치게 되던 들판에서 새 둥지 속 알들을 찾기도 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다. 내성적이라 학교에서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책에서 안식처를 만났다. 학교 근처에 있던 도서대여점에서 한 무더기씩 책을 빌려 와 줄기차게 읽었다. 영미 소설, 러시아 소설, 특히 셜록 홈즈 시리즈, 괴도 루팡 시리즈는 내 단골 메뉴였다. 점차 내 관심 영역이 넓어지면서, 광화문의 교보문고, 종로 2가의 옛 종로서적이 내 방과 후 교실이 되었다. 거기서는 온갖 주제의 책들이 멋진 옷을 입고 나를 반겨주었다. 주머니 사정상 새 책은 주로 삼중당 문고판으로 샀다. 서점의 책장 하나를 내 방에다 옮겨 놓은 것처럼 작은 책들이 하나둘씩 쌓였다. 그러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두어 명 생겨 서로 책을 바꿔보기도 했다. 이러한 생활은 고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몸을 움직여 땀 흘리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늘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니 몸을 단련해야겠다 싶어 특별 활동 시간에 무용반에 들었다. 이는 무용 선생님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대무용을 전공하신 선생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셨는데, 유럽 무용 경연 대회에 갔다 오신 이야기를 무척 흥미롭게 해 주셨다. 서양인 무용수들과 거울 앞에 나란히 섰을 때 그들의 크고 늘씬한 몸매 옆에서 주눅이 들었다는 고백이 기억에 남는다. 무용반의 선배 언니들은 대학 무용학과 지망생들이었는데, 그들의 자세와 손동작들이 무척 우아했다. 난 생전 처음 몸에 딱 붙는 무용복을 입고 자세 교정과 체조 동작을 열심히 따라 했다. 선생님의 북소리에 맞춰 학생들과 함께 넓은 체육관을 뛰고 구르며 몸을 움직일 때, 체육관 벽면에 설치된 가로 봉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체조 연습을 할 때, 마룻바닥에 땀이 비 오듯 뚝뚝 떨어질 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내가 처음보다 자세가 좋아지고 동작도 많이 늘었다며 칭찬해 주셨다. 지금 돌이켜 보면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문예반으로 오라는 국어 선생님의 초대도 거절하고 2년 동안 열심히 무용 연습을 했다.
그러다 세월이 많이 흘러 미국에서 유학 생활할 때 산책하는 습관이 생겼다. 직접적인 계기는 내가 다니던 학교에 행사 참석차 오셨던 은사님 덕분이었다. 기말 논문을 쓰느라 책상머리에서 끙끙대고 있었는데 은사님께서 “글이 안 써질 때는 산책하고 오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 말씀에 따라 학교에서 1.6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미시간 호수까지 걸어갔다 오곤 했다. 신기하게도 바람을 쐬고 와서 책상에 앉으면 생각이 정리되고 글이 술술 나왔다. 귀국 후에는 한강변을 주로 걸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투병 중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 한강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신에 대기 상태가 좋은 날이면 어머니와 함께 동네 산책로를 걷고, 귀염둥이 몽실이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돈다. 그러면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고 잠시나마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삶이 한층 더 버거워진 요즘, 마리아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볼 좋은 기회이다. 사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번 위기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들, 가령, 책 읽기, 요리하기, 화초 가꾸기, 요가와 명상 하기 등을 시작하고 있다. 특히, 외출을 자제하다 보니, 전자책과 오디오북 판매량이 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집에 머물면서 할 수 있는 활동 가운데 책 읽기만큼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 없을 듯싶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책 읽기 운동에 동참하여 나도 어렸을 때의 즐거운 독서 경험을 되살리려 한다.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책이 펼치는 놀라운 마법을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를 먼 곳으로 데려다 주는 데
책 같은 배는 없어요
약동하는 시 한 편 만한
경주마도 어디에도 없지요
극빈자도 다닐 수 있는 이 길은
비싼 통행료도 필요치 않아요
얼마나 경제적인가요
인간의 영혼을 태운 그 마차는.*
이 시에서 디킨슨이 꿰뚫어 보고 있듯이, 우리는 책을 통해서 배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하고, 경주마를 타고 달리는 듯한 경험을 한다. 책은 또한 저자의 영혼을 담고 있어 우리의 영혼과 교감을 이루기도 한다. 이렇게 귀한 만남이 이뤄지는데 비싼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 19사태로 온 세상이, 디킨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납과 같이 무거운 시간 (hour of lead)”을 보내고 있다. 이럴 때 안식처가 되어 주는 책이 있어 감사하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책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길 바란다. 계절의 순환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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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
To take us Lands away
Nor any Coursers like a Page
Of prancing Poetry--
This Traverse may the poorest take
Without oppress of Toll--
How frugal is the Chariot
That bears the Human Soul. (J1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