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그 맛에 반하다
신 영 애
휴일 아침.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각.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싸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커피를 내린다. 커피 향이 주위에서 퍼져나간다. 다 내려지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머그잔에 담는다. 코끝으로 먼저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마셔본다. 그래 역시 이 맛이야. 혼자 중얼거리면서 어제 읽다가 엎어놓은 책을 펼친다. 평온한 아침이다.
여고 시절, 외국에 있던 작은 오빠는 학용품과 예쁜 장식품 같은 것을 국제우편으로 보내주고는 했다. 지금은 ‘Made in Germany’ ‘Made in Japan’ ‘Made in Taiwan’ 하는 물건은 마음만 먹으면 굳이 그 나라에 가지 않고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 강원도 시골에서는 해외에 갔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이나 외국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전해 받는 게 대부분이어서 귀한 물건이었다.
작은오빠는 주로 문구류와 펜 종류를 많이 사서 보내주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를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았다. 볼펜으로 노트필기 하던 여고 시절 나는 독일제 만년필로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많이 받았다. 펜글씨 수업 시간에 친구들은 펜촉에 잉크를 묻혀서 글씨를 썼다. 그러나 나는 오빠가 보내온 만년필로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다. 만년필의 뒷부분을 돌돌 돌려 열고 만년필 잉크 담는 부분을 꺼내 잉크를 넣어서 다시 돌돌 돌려 닫는 그 과정이 재미있고 좋았다. 비단처럼 고운 천으로 포장이 되어있던 타이완제 다이어리는 사춘기 소녀의 습작 노트였는데 결혼 전 친정에 두었다가 이사하면서 잃어버렸다고 하니 이제는 추억 속의 다이어리가 되었다.
여고 2학년 가을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오빠가 보낸 국제 소포가 도착하였다. 까만 콩처럼 생긴 것들이 포장지를 풀자 내 코끝에서 향기로움으로 피어났다. 콩인 듯 콩이 아닌 듯 만지면 손에 까만 게 묻어날 것만 같았다. 밥을 해 먹으라는 것인지 땅에 심으라는 것인지 별도 얘기도 없어서 향기로운 그 콩은 우리 집 부엌 다락에 고이 모셔두었는데 어쩌다 다락에 올라갈 때면 방 안 가득 퍼져있던 그 향기로움을 나는 참 좋아했다. 그러다가 오빠가 귀국했다. 오빠는 커피 한잔을 마시자고 했다. 커피. 그 이름도 생소한. 나는 그건 어디서 마시는 거냐고 물었다. 오빠는 그해 여름에 우편으로 보내준 적 있는데 아직 안 먹어봤느냐고 하면서 가져와 보라고 했다. 오빠는 조그마한 돌절구에 커피콩을 한 움큼 집어넣고 콩콩 빻기 시작했다. 아~그 향기.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 향기. 가끔 간식거리로 엄마가 볶아주시던 콩하고는 다른 맛이었다. 오빠는 이상한 콩과 함께 보내온 종이를 밥공기에 올려놓고 그 위에 투박하게 빻아진 커피를 올리고 뜨거운 물을 붓기 시작했다. 향기는 너무나 구수하고 좋은 데 반해 맛은 그 씁쓸함이 쓸개처럼 독해서 한 모금 마시다 말고 나는 못 먹겠다고 뱉어 버렸다. 오빠는 이렇게 향기로운 커피에 퉤퉤 거리는 나를 두고 이 맛을 제대로 알게 되면 너도 빠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혀 친해질 것 같지 않던 그 씁쓸한 커피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먹어보려고 시도를 했으나, 커피콩을 가는 번거로운 과정에 비해 그 맛에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하여 그렇게 흐지부지 잊혀 갔다.
그러다가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때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였다. 사무실의 막내였던 나는 아침마다 상사와 동료들의 취향에 맞게 커피를 타는 심부름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던 메뉴는 다름 아닌 커피 크림 설탕의 비율이 2:3:2였다. 달달한 커피. 나 역시 그 조합으로 커피를 타서 마시고는 했다. 그 이후에는 커피믹스라는 이름으로 황금비율로 조합된 인스턴트 커피가 나오면서 커피 애호가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종이컵에 타서 마시고 난 뒤 컵에 남아있는 잔향마저도 구수하다고 생각했으니 아마 나는 그때부터 커피를 좋아했던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면 불면증이 온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하루 세잔 정도는 마신다. 한때는 밥값보다 더 비쌌던 아메리카노가 직장인들의 장식품처럼 점심 후 떼로 몰려다니면서 커피전문점의 이름이 들어간 컵을 들고 다닌 것이 유행처럼 일어났던 적도 있다. 나폴레옹은 ‘나에게 빚진 돈을 갚지 않아도 좋으니 그 대신 커피를 주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커피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렇게 말을 했을까. 요즘은 커피의 종류도 많고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건강을 생각하여 과일차나 꽃차를 마시는 경우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래도 나는 커피가 좋다. 그것도 아무것도 넣지 않은 블랙으로.
길을 지나다가 어디선가 커피 향이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아~하고 탄식을 할 만큼 커피 애호가가 되었다. 멀리서도 내 코를 자극하는 그 향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도 한다. 특히 아파서 입맛이 없을 때는 뜨거운 커피를 내려 거기에 밥을 말아 먹으면 그 구수하고 쌉싸름한 맛에 어릴 적 오빠가 커피콩을 갈아서 타주던 커피 생각도 나면서 힘도 나고 참 좋았다. 정작 작은 오빠는 지금은 커피믹스만 찾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원두커피 고유의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어쩌면 커피는 그렇게 내게 어릴 적 향수를 불러오는 마술이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힘겹게 보내던 여고 시절 나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던 오빠가 보내온 그 쌉싸름하고 까만 커피콩. 그 맛을 제대로 알게 되면 빠지게 될 거라던 오빠의 말처럼 커피는 내 삶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쉴 틈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휴식이 필요할 때면 나는 작은 여유를 주기위해 커피를 찾는다. 커피가 다 내려졌는가 보다. 오늘 아침은 구수하고 향기로운 인생 한잔으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