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다는 것은
신 영 애
내가 사는 아파트와 이웃에 접한 아파트 사이에 조그만 샛길이 있다. 마트를 갈 일이 있거나 병원이나 편의점을 가기 위해서 그 샛길을 지름길 삼아 다니고는 했다. 어느 날 늦은 시각 길 건너 약국을 다녀오면서 그 샛길을 걷고 있었다. 밤 10시가 훌쩍 넘긴 시간에 행인조차 없는 야심한 밤이었다. 아파트 4~5층 높이 정도 되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서 달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좁은 샛길로 슬쩍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불현듯 이 길이 초행길이라면 좀 무섭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늘 다니던 길이다 보니 익숙해져서 안심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저녁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얘기했더니 환한 길을 두고 뭐하러 그 길로 지나다니느냐고 통박을 맞았다.
가끔 출근길에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한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서 출근한다. 그리고 계단이 많은 곳이면 가능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기보다 그냥 계단을 이용하여 걸어서 올라간다. 청담역에서 내려 회사가 있는 강남구청역까지 걸어가려면 전철로는 한 정거장이고 버스로는 세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이다. 시간상으로는 25분~30분 정도 소요된다. 길은 약간의 경사길이어서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는 땀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몇 달을 계속 걷다 보니 걸을 만했다. 익숙해질 즈음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요즘은 경로를 바꿔서 걷기를 한다. 그냥 일직선으로 죽 걷기보다는 골목길로 접어들어서 걷기도 하고 회사를 지나쳐서 더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한다. 거리는 비슷하지만, 경로를 바꿔서 걷게 되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익숙함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걷는 동안 익숙하고 편안한 경로가 나오면 나는 일부러 돌아서 새로운 길로 걸어보려고 한다. 비록 출근 시간이라 마음이 급하더라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걸어간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한 날은 다음 날 조금 일찍 출발해서 걸어본다. 누구는 바쁜 출근 시간에 걸어서 출근하는 것을 두고 종일 피곤하지 않으냐고 걱정해 주기도 하고, 부지런하다고 칭찬해 주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말한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라고.
아는 선배 중에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 있다. 선배 생각에는 내가 걱정되어서 해주는 말일 수도 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처음 들어갈 때 많이 받아야 해. 일단 들어가면 더 달라고 할 수도 없잖아. 그걸 왜 받았어? 못하겠다고 하지.” 내가 십 년 전 현 직장으로 이직하려고 했을 때 인수인계도 엉망이고 연봉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대자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새로운 곳에 출근하여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나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거래처 사람들은 새로 맞이한 실장이라는 담당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무엇이든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마음을 어떻게 내보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상담하기 안 미더워했다. 지난 15년 정도의 경력이 무색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내가 아니라는 노래 가사처럼 나는 딱 3년만 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안 되면 더 나이가 들어 이직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과감히 접기로 했다.
20년 전, 공부하기 위해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나와서 전공을 살린답시고 겨우 조그마한 회계법인에 신입으로 입사를 했다. 당시 세무사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대개 여상을 졸업한 후 바로 입사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대졸 신입사원이 들어온 것이다. 선배들은 내게 업무를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커피 심부름이나 복사하는 것 외에는. 그저 시키는 일만 할 뿐. 나보다 나이 어린 선배들 속에서 어쨌든 나는 견뎌내야 했다. 회계사님은 감사 나가실 때면 나에게 가방을 들고 따라서 오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괜찮을 걸세.” 차 타고 가면서 내가 이곳에서 잘 견뎌내기를 바란다고 말씀을 하셨다. 괜히 대기업을 그만두었다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다. 어느 날 이렇게 후회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연구(?)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혼자 남아 두세 시간씩 공부했다. 두꺼운 세법 책을 펼쳐놓고 법인세와 종합소득세가 산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회계사님이 회의 시간에 어떤 질문을 하셨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던 일을 단순하게 외워버린 내가 대답한 것이다. 순간 모두 놀란 표정으로 직원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더불어 나는 자신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록 외워서 대답한 것일지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무 일로 접어들어서 결혼과 출산, 육아 등의 일로 그만두었다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그렇게 3년만 해보자고 시작한 곳에서 10년을 넘기고 있다. 거래처 사람들과 편안해지고 익숙해져서 가족 얘기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님은 나의 업무 스타일을 좋아하셨고 그와 더불어 꾸준하게 연봉도 올랐다. 사람들은 내가 이 업종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것과 관련하여 힘들지 않으냐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럴 때 나는 또 말한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라고.
지금도 나는 나의 길을 찾으면서 가고 있다. 어떤 일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힘이 들지도 모른다. 익숙해지고 편안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무언가의 끝인 듯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수필 수업을 시작해보니 그동안 내가 익숙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속에는 설렘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으로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겨울바람과 시린 눈을 이겨내고 난 뒤 비로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새벽이 온다는 것을 알고, 파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곧 고요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별을 보려면 어둠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 다른 기다림의 연속일 수 있는 익숙함으로 나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