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사이의 관계도 세월과 함께 변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결혼 후 10여 년 동안은 금슬이 좋았다. 크고 작은 일들로 매일 티격태격했지만 그것은 살아가는데 조미료 같은 것이었다. 지인들도 우리 부부의 모습이 참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돌이켜보면 그 10년이 우리 부부 사이의 관계로서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 후는 서로 존재의 실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된 후 일이 묘하게 변했다. 아이들을 내보낸 그 품안이 허전했던 아내는 또 다른 아이가 필요했었나보다. 사사건건 나를 가르치러들었다. 난 ‘30년 동안 변하지 않던 행동이 말 한 마디로 고쳐질까. 그냥 살지.’ 하면서 웃어넘겼다.
아내의 불만이 점점 싸이는가 싶더니 나를 향하던 화살이 갑자기 대학생인 막내를 조준했다. 막내가 꼬투리 잡힐 행동을 보이자 십자포화를 퍼부어댔다.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상황이 아내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맞장구를 쳤더니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막내는 울고불고 난리다. 갑자기 집안이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묵언수행’이란 단어를 떠 올렸다. 이 상황을 그대로 정지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동선을 피해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홍수가 지난 하천의 탁한 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깨끗해지는 것처럼 집안의 분위기도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내의 이유 없는 불만은 계속되었다. ‘황혼이혼’이란 말을 매스컴으로부터 접했을 때, 늘그막에 미친 짓이라며 비웃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황혼 이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할 수 있을까. 내가 전에 알던 아내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를 시험하려는 신의 장난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상황은 신이 장난치는 거다. 신의 장난에 말려있는 가족에게 화를 낼 수는 없지 하며 나름 방법을 찾았다. 선생님한테 매를 맞는 학생이 떠올랐다. 선생님의 회초리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선생님은 화가 나서 더 때리게 된다. 참을 만해도 아파 죽겠다며 엄살을 부리며 눈물을 보이면 선생님은 씩씩 거리며 회초리를 거둔다. 이 방법을 써야겠다.
다음 날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힘들어 죽겠다며 보이지 않는 신에게 통사정을 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신에게 통사정을 하며 지내는 동안 화를 내는 아내를 보면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만 할 때가 됐네 하며 당신도 참 불쌍한 사람이야. 신의 장난에 그리 오래 놀아나나.
그러는 동안에 막내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날 때가 되었다. 막내는 9박 10일 동안 뉴욕으로 자유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난 막내의 여행일정에 맞추어 하계휴가를 계획하였었다. 아내와 휴가를 함께 떠날 분위기가 아니다. 휴가라고 하여도 강원도 산골에 가서 농사일을 하는 것이다. 그 때 묘한 생각이 일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서로 각자의 시간을 가져보자. 가족이란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휴가를 유의미하게 보낼 수 있는 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은퇴 후 귀촌을 위하여 강원도 정선에 조그만 밭을 구하고 임시로 컨테이너 막사를 설치하고 가끔씩 찾아가서 밭을 일구던 중이었다.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번 휴가는 그 곳에 가서 풀도 베고 밭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어찌 할 건가? 하고 물으니 예상했던 대로 혼자 가란다. 막내는 외국에서, 아내는 집에서, 난 시골에서 열흘 동안의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강원도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열흘 동안 먹을거리를 장만하였다. 시장에서 토종닭을 구하여 닭백숙을 만들었다. 막걸리 몇 통을 샀다. 열흘 동안 먹을거리를 딤채에 넣었다. 첫날은 준비 작업을 하고 다음날부터는 일을 시작하였다. 예초기로 밭의 풀을 베는 작업을 했다. 무더운 여름에 예초기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두어 시간 작업하고 같은 시간만큼 휴식을 취하며 이틀에 걸쳐 풀 베는 작업을 마쳤다. 나흘째 되는 날은 밭에 조그마하게 일구어 놓은 텃밭의 풀을 뽑았다. 농사일은 마무리 되었다. 먹을거리와 책을 들고 아무도 없는 계곡으로 향했다. 널빤지를 하나 주워서 앉을자리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독서를 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하면 물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걸었다. 풍광 좋은 자연에 있는 즐거움을 느끼며 하루를 보냈다.
그 다음날이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점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다시 계곡으로 향했다. 어제와 같은 일상을 반복하였다. 흘러가는 계곡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흐르는 물에 나의 시간이 떠내려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광이 좋은 자연에 있어도 혼자만 즐긴다는 것이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부부란 시간을 공유할 때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집을 떠난 지 닷새 만에 짐을 쌌다. 늦은 저녁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지금부터 휴가를 보내려고 하는데 왜 벌써 왔느냐며 아내가 놀린다. 할 일 다 하고 왔다며 얼버무렸다. 외견상으론 아무 일도 없이 그렇게 여름휴가는 끝나버렸다.
휴가 기간이었지만 회사에 일이 생겨서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막내가 귀국을 하였다. 혼자 떠난 여행이라 걱정도 많이 했지만 건강히 돌아왔다. 막내의 여행담을 들으며 여름휴가를 마무리 하였다. 각자가 홀로 보낸 그 시간은 내면으로의 여행이 되었나보다.
휴가가 끝난 날부터 우리 가족은 다시 평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