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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그대로    
글쓴이 : 정민영    13-09-23 17:30    조회 : 10,195
 삶이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남게 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시간이 흘러서 어느덧 아이가 결혼할 때가 되었다. 아이의 결혼 날짜가 결정되고 점점 시간이 다가오니까 마음만 바쁘다. 아내는 아이의 시간을 정리하고 있다.
 자라온 과정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사진첩을 꺼내들고 빛바랜 사진을 정리한다. 가끔은 오래된 사진 속의 풍경에 눈을 고정 시키고 생각에 잠긴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참견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앨범정리가 끝나자 유치원 시절부터의 일기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는 생활통지표와 각종 상장, 임명장 등을 정리하니 아들의 인생이 시간의 순서로 서재에 놓여졌다.
 모두가 잠든 늦은 저녁이다. 잠이 오지 않아서 서재로 갔다. 아내의 손을 거친 아들의 시간이 궁금했다. 먼저 유치원 시절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한자 한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 속에는 꼬마 손과 유년의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 있었고, 아빠, 엄마가 있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앨범을 펼쳤다. 큼지막한 돌 사진 뒷장으로 아이의 삶이 놓여졌다. 그곳에는 나의 시간도 함께하고 있었다. 아이의 시간을 더듬어 가다가 아이와 야구를 하는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가전제품을 살 때에도 LG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구입해야만 할 정도로 특히 LG의 광팬이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아이는 타자를 하고 난 투수가 되어 아파트 공터에서 야구를 즐겼다. 어느 날 아이의 고무공이 하수구에 빠졌다. 공이 없으니 집에 가자며 아이를 달랬지만 아이는 하수구 구멍 앞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간절한 아이의 모습을 아내가 카메라로 잡았다. 아이의 간절함은 아빠에게 무모한 용기를 불러왔다. 공을 꺼내기 위해 무거운 하수구 뚜껑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된 하수구 덮개는 쉽게 들려지지 않았다. 아이 앞에서 아빠의 권위가 떨어지려는 순간 뚜껑이 들려졌다. 오물 속에서 공을 꺼내 물로 씻어서 아이의 손에 건네자마자 허리에 통증이 왔다.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가시더니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허리뼈에 무리가 온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에게 좀 쉬였다 하자며 달래고는 아내의 부축을 받고 방바닥에 엎드려있는데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렸다. 그 때는 젊음이 있어서 파스 한 장으로 해결했지만 지금도 가끔씩 가벼운 통증을 느끼고 있다. 그 사건 이후로 아이와 공터에서 야구놀이 하는 것은 해방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가 싶더니 어느덧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한다고 한다.
 아이의 성장과정은 가족이 행복을 공유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사진 속에는 웃음이 있고, 꿈이 함께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있다. 그런 웃음과 꿈과 행복이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조용히 앨범을 덮고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잘 수 없는 밤은 시간을 결혼 전으로 돌려놨다. 결혼 전에 아내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아온 시간들은 어쩌면 오늘의 삶보다 미래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살지 않았나 싶다. 삶이 어렵고 고단해도 미래의 어떤 시간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은 삶 자체가 행복이었다.
 노년의 삶이 가까이 다가오는 지금은 그토록 오랫동안 추구하던 행복이 이런 것인가 하는 현실을 경험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권태란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는 삶이다. 권태는 불화를 야기하고 지나온 삶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는 노년기의 가장 무서운 적이다.
 아이의 시간을 더듬다가 현재 가정의 모습을 보면서 삼십년 전과 지금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가족 구성원들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 외에는 과거와 현재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가족 간에 자신의 경험으로 타인의 삶에 간섭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간섭은 서로의 감정에 생채기를 만들고 상처가 하나 둘 쌓여가는 만큼 무관심의 영역이 커지게 되는 것 같다. 가족 간의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큰 상처가 아닌가 싶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지켜봐 주고 격려해 주는 것!
 이 순간에 가족 간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을 한다.

강희진   13-09-26 10:26
    
매우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십니다...
그러니 섬세한 글이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드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저도 벌써 애들 키운 게 추억이 된 나이가 됐습니다. 허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후반부는 제목과 연관되어 선생님이 보내는 멧세지같은 데....
그런데 오히려 사족이 된 느낌은 선생님의 추억에 너무 빠져있는 감성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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