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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시학 이성열 10년도 훨씬 넘는 사이를 두고 LA근교 데스칸소 공원엘 다시 간 적이 있다. 10년 전만 해도 젊은 나이였고 지금에 비하면 훨씬 인생의 여유도 많았으련만, 왜 나는 커다란 나무를 보고 그런 상념에 젖었었는지 모르겠다. 오후 한 때를 공원에 있는 수목들과 교감을 나누다가 커다란 유칼립투스 나무를 쳐다보며, “그대는 지금 몇 살이나 되었오? 아마 우리 인생보다 훨씬 오래 버티고 사는 그대는 나보다도 훨씬 많은 나이테를 지니고 있을 거요. 아마도 어린 소년으로 그대 앞에 와서 놀던 인간이 초로의 나이가 되어 그대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더러는 아주 늙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할 거요. 그대는 내가 지난번에 왔을 때나 별 변화가 없구려. 다음에 여기에 올 때도 그대는 여전히 울울창창한 거목으로 서 있겠지요?” 이렇게 말하며 그 앞에 서있는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나무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그래서 뒤뜰의 나무 하나를 베드라도 꼭 필연의 경우를 빼고는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곤 한다. 언젠가 비바람 몰아치는 이곳 남가주의 겨울도 지나고 보니 어수선하게 묻혀있던 잡초 사이에서 오동나무 과에 속하는 어린 나무가 늘씬하게 뻗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곳이 나무가 필요 없는 위치고 지붕과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베어버릴까 하다가 그 생김새와 서 있는 기품이 하도 늠름하여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나무가 한 해 다르게 쭉쭉 뻗어나가 몇 해가 지나자 커다란 나무가 되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더니 가을이면 집 주위에 너저분하게 잎을 뿌리고 바람 부는 겨울에는 지붕으로 그 가지가 부러지는 둥 사고뭉치로 변하여 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심 후회가 막심하게 된 것이다. 저놈을 어려서 회초리만 할 때 잘랐다면 이런 피해가 없으련만……. 하는 수 없이 나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며 나무 베는 전문가를 불러 그 나무를 베어 버려야 했다. 내가 손수 자르자니 감당해 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냥 내 버려두면 후환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 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켜 지붕이라도 뚫어 놓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또 한 가지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내 집 앞에 있는 가로수 이야기다. 이 나무의 정확한 이름은 모른다만 여하튼 이 나무는 생김새도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먼 엘에이 가로수로서 꽤 자주 볼 수 있는 나무다. 곧게도 자라지 않고 구렁이 몸을 틀 듯 자라면서 꽃은 피우는데 제법 향기를 풍긴다. 향기만을 보고 뽑았을 리도 없겠고, 이 나무들이 어떻게 해서 가로수로 선택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이놈들은 아주 고약한 근성을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니고 뿌리의 횡포다. 그 뿌리를 가지고 땅 속을 휘저어 놓는 데는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괴팍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나무가 있는 길의 보도는 땅이 온전치 못하게 치솟고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길 가던 사람들이 발이 걸려 넘어져 다치기도 하지만, LA시당국은 부족한 예산 때문에 손도 못쓰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하루는 내 집 앞 정원이 허당처럼 푹 들어가 버리는 거였다. 이유를 알기위해 삽으로 잔디를 걷고 보니 사방 몇 미터 안이 텅 빈 굴처럼 뚫려 있었다. 그 원인을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다른 거는 없고 앞에 있는 나무가 그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 되었다. 왜냐하면 그 구덩이 속에는 그 나무로부터 온 커다란 뿌리가 있었고 그 밖에는 아무런 다른 징후가 없었다. 보통 나무는 그 뻗은 가지만큼 뿌리를 가지고 있고, 그 뿌리를 팔처럼 이용하여 땅 속을 휘젓는다는 거였다. 결국 나는 거의 한 트럭분에 흙을 구하여 그 구멍을 메운 적이 있다. 얼마 전엔 LA에서 서 있던 거목이 갑자기 길로 쓰러지는 바람에 죄 없는, 그것도 한국여성이 차를 몰고 지나다가 압사하는 사고도 있었지만, 그런 불상사를 제외하고 나무는 참으로 이 땅의 생명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대단한 은혜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걸 열거해보기로 한다. 우선 나무는 많은 시인들에게 시적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아래는 많은 시인들의 시중 내가 좋아하는 나무에 관한 시의 한 편이다.
나무만큼 사랑스러운 시는 볼 수 없으리라 나는 생각하지 달콤하게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굶주린 입을 대고 있는 나무
온종일 신을 향해 쳐다보고 잎새 무성한 팔을 들고 기도하는 나무 여름엔 자신의 머리에 로빈 새들의 둥지를 이고 있는 나무
내린 눈을 가슴에 보듬고 비와도 친근하게 살아가지 시야 나 같은 바보들도 짖지만 오로지 신만이 만들 수 있는 나무 나무들/조이스 킬머 시의 소재도 소재지만 나무는 말 그대로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모든 생물들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량한 이웃이다. 나무는 인간에게 그늘을 만들어 시원함을 베풀지만, 그 베품은 인간에게 뿐 만이 아니다. 새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에게 그 베풀고 나눔을 어찌 이루 말로 다 하랴. 과일과 씨앗을 열어 모든 생물들에게 먹이고, 하물며 제 살을 파 먹히며 벌레 같은 미물조차도 박대하지 않고 품에 싸고 기거케 하며 그 결과 새들의 먹이로 제공한다. 우리의 친근한 이웃으로 잊을 수 없는 나무는 어릴 적 동네에서 사랑받던 정자나무다. 어린 시절 허구한 날을 정자나무 밑에서 매대기질 치며 놀고, 어른들이 그네도 매주면 놀고, 그 아래서 늘도 뛰며 놀고, 그야말로 정자나무 아래서는 어릴 때의 추억거리가 많다. 정자나무는 우리에게 언제나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제공해주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친근한 나무였다. 그밖에도 나무는 홍수를 막아준다. 겨울엔 눈사태도 막아주며 또 폭풍을 막는다. 그 뿐인가?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천둥, 번개, 날벼락조차도 막아준다. 죽어서는 집을 짓는 재목, 기둥과 서까래를 담당하며,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종이도 나무다. 그 재목을 쓰고 남은 자투리는 불쏘시개, 나무는 이렇게 버릴 거라곤 하나도 없는 우리 삶의 근본적 질료로서의 역할을 잘 맡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지구상에 지하수가 점점 고갈되어 앞으로 나무는커녕, 사람 쓸 물도 없어 큰일이란다. 벌써 아프리카 어디에선 지하수가 고갈되어 쓸 물이 없으므로 정부에서 나서서 모조리 나무를 베기로 결정하고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부족한 농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해마다 수십만 에이커에 달하는 삼림을 태워 없애고 있다. 이게 무슨 변고인가? 문제는 사람들이 물과 공기가 귀한 줄 모르고 남용하여 이 지경이 되어가고 있다. 잘사는 사람들은 부족한 물을 사막에서도 끌어다가 정원 잔디에 퍼부어 자신들 만의 푸른 세상을 만들고자 남용하고, 쓰지도 않는 풀장을 만들어 남에게 과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더럽히는 공기는 또한 어떤가? 인간이 뿜어내는 이산화산소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그 결과 기후변화 및 재앙을 불러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 않나. 세상에 나무가 없이 인간생명의 유지보전이 가능이나 한 것인지, 나에겐 이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 땅의 주인인 나무, 이는 인간과 모든 생물들이 멸망한 후에도 끝까지 이 지구에 버티고 살아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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