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 -신영애-
퇴근길. 해가 저물어가는 노을을 본다.
밤이 되어도 어둠이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쭈뼛거리고 있고 세상의 소리는 아직도 잠들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요란스럽다. 하루 종일 업무와 씨름하느라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이 시간에 전철에 올랐다. 다들 초점을 잃은 눈빛이 삶에 지쳐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다. 가벼운 움직임에 어깨가 슬쩍 부딪쳐 메고 있던 가방 끈이 툭 떨어져도 서로 찡그림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할 기운조차 없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이해한다는 동질감인 듯 무심하게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그런 모습이 마치 또 다른 나를 보는듯하여 애잔하기 까지 하다.
태양은 넘어 간지 오래인데 뚜벅뚜벅 걷는 내 걸음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어줍잖게 어른 흉내를 내는 듯 낯설지는 않으면서도 측은하다는 생각만 든다. 무엇을 위해서 이리 열심히 살아가는 건데... 왜 쉰다는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자신을 들볶아 가면서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는 건지... 그냥 가끔은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바쁜 날은 전화도 더 많이 온다. 비록 내가 걸지는 못하더라도 걸려오는 전화는 성실이 받고 싶다. 그들이 내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에 대하여 나도 그러하다는 의미를 표현 하는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친정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서 당신은 참 고단했을 삶을 표현하지 않고 잘 살아 내신듯하여 존경스럽다고 생각이 들었다. 전화 내용은 언제나 같다.
“밥 잘 먹고 다녀라. 감기 걸리지 않게 옷 단단히 입고 다녀라. 엄마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사실은 가장 엄마다운 아니 인간다운 모습이었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같은 믿음과 기다림으로 표현해 주시던 모습이었던 것을.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흐른다. “엄마, 나 힘들어...”하고 떼를 쓰고 싶은 마음을 접고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감기 안 걸렸고, 밥 잘 먹고, 애들 공부 열심히 하고 김서방도 잘 있다고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직장 다니랴, 집에서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랴,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세월을 20년 가까이 보내놓고 보니 할 얘기는 많았으나 막상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머릿속이 까마득하다. 또 사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많은 직장 맘들이 나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어쩌면 스스로에게 위로도 해 주고 싶었다.
뚜벅이 처럼 고개를 숙이고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걷는 것에 대하여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모습들. 아침마다 종종걸음으로 시간에 쫓기면서 사계절을 누려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헐레벌떡 앞만 보고 달려 온 시간들. 인생 뭐 별거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별거 있다고 외쳐본 들 그 누가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줄 수 있을까. 아직도 뭔가에 갈증을 느끼고 아쉬운 마음이 더 앞서고 몸이 따라 주지 않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련함에 나 스스로도 회의적이기 까지 할 때가 많았는데.
모닝커피 한잔에 감동하고 우르르 몰려 나가 의무감으로 해결하는 점심시간은 또 어떠한지. 좀 더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싶었던 치기 어린 마음은 이제는 아득하고 먼 이야기 같다. 사회생활조차 노련해 짐과 동시에 타협점을 우선 찾게 되는 늙은 병사가 되어 언제 밀려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 업무가 내 마음속에서는 전쟁이다, 퇴근길이면 초점을 잃은 멍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몸이 기억하는 노선에 나를 맡기고 철교 위를 지날 때마다 운이 좋아 노을이라도 보는 날이면 문득 허리를 펴고 바라보는 저 시선의 끝에 내가 서 있어 우리가 바라보는 노을이 다만 저물어 가는 빛이 아님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낄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빛이기를 희망해본다.
고독한 나그네의 걸음 속에서도 붉은 태양은 세상 속으로 고요하게 물들어가고 한낮의 뜨거움이 식은 뒤의 저녁노을은 우리 모두에게 편안함을 주는 안식처가 되기를 그리하여 지는 노을 뒤에는 꼭 어둠만이 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