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밤 올빼미 우후후우 울어 겨울은 저물어요.
시린 아쉬움 크는데 개구리 어둔 영혼 마구 울려 고즈넉히 마당에 섭니다.
이른 봄밤 개구리 구애의 세레나데로 절골 흔들거립니다.
어디에 저런 웅혼한 기상이 숨어있어 님을 향한 힘찬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요.
자연은 경이 그 자체 입니다.
총각시절 서울에 살며 나 하나 호구지책도 하기 힘들었던 내가 여섯아이 아빠로 어머니 집사람 선녀님 아홉식구 가장으로 살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이런 자연 응원 덕택 입니다.
자연 중에 가장 위대한 힘 바로 사람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사람도 순전한 자연이라 선녀님 집사람을 어찌 만나 구애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사랑을 하여 어느덪 스물 여덟 성상을 개구리 힘찬 떼창을 함께 들으며 이런 봄날을 맞았습니다.
봄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절골은 흰구름이 산등성이를 오르내리고 개구리소리 그윽하여 완전히 딴세상입니다.
그래 혼자 하기 아쉬워요.
이런 정취에 사시사철이 봄에 백화요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요 가을에 보름달이요 겨울에 흰 눈입니다.
보석해 뜨면 일어나 밭에 나가 일하고 보석해 지면 비단 어둠에 잠자리 듭니다.이런 리듬에 봄이 오고 가을 가니 어느덪 머리 서리 하얗게 내린 육순 문턱 입니다. 아이들 자라 대학가고 군대가니 세월 간줄 알지 그저 땅파고 달보고 마냥 그 세월만 같아요.
봄이 와 절골 텃밭에 첫 찰옥수수를 심었습니다.
가을 겨울에 모아둔 삭힌 똥거름을 뿌리고 아름들이 소나무도 넉끈히 키우는 최상의 거름, 부엽토를 골짜기에 가서 자루에 담아 밭가득 뿌렸습니다. 이 부엽토 먹고 자란 산중 더덕은 향이 뛰어나고 부드럽기가 으뜸입니다. 아무리 유기농을 하여 더덕을 재배해도 자연산 맛을 따라갈수 없습니다. 허여 부엽토로 근접 농사는 할수 있습니다.
경운기로 밭을 로타리하고 사람이 끄는 쟁기, 후치기로 골을 지어요. 집사람 소가 되어 잘도 갑니다.
이놈의 소
어서 들어서!
ㅎㅎㅎㅎ
다음은 옥수수 씨앗통을 옆에 차고 호미로 구덩이를 파 세 네알 넣고 묻어요.
나중에 싹이 나오면 초벌 김메기 할때 실한거 두대만 남기도 나머지는 뽑아버려요. 잘나지 않은 곳에 보식으로 심기도 합니다.
이렇게 찰옥수수를 세번에 걸쳐 순차를 두고 심어요.
첫번째는 삼월 말이나 사월 초순에 심고
두번째는 사월말이나 오월 초순에
세번째는 유월 하지 무렵에 심어요
그러면 삼복 더위 여름휴가 무렵에 첫물 수확해 쪄먹기 시작해 찬바람 나는 가을까지 찰옥수수를 먹을수 있어요.
여름밤에 먹는 옥수수도 맛있지만 찬바람나는 가을에 먹는 옥수수는 뭐라 말할수 없을 정도로 죽여줍니다.
그러다 보면 송이철이요 추석맞이여요.
추석무렵에 찰옥수수는 최고입니다. 그래 꼭 하지옥수수 꼭 심어요.
거름을 비료로 준 건지 퇴비로 농사한건지 옥수수 먹어보면 금새 압니다.
농사도 농사꾼 심성을 닮아 똑같이 유기농으로 했어도 맛이 천차만별입니다.
곡성에서 사과농하는 친구가 와 자기는 찰옥수수 농사해도 거들떠보지 않는데 여기서 먹어보니 희안히 맛있다 하며 웃은적이 있습니다. 농사도 아이들 기르는 것처럼 정성에 정성입니다.
아이들은 길 확포장 한곳까지 스쿨버스가 와 아랫마을까지 3키로 자전거타고 내려가 탑니다. 여기서 학교까지 이십리도 넘은 길입니다.
처음에 이사왔을 시에는 십리쯤에 있는 지품초등학교 분교가 폐교하며 하숙비를 주어 그 값으로 아이들을 부모님들이 아침 저녁으로 등하교를 시켜주고 있었습니다. 본교다니는 다른 먼 마을 아이들은 스쿨버스가 다니고 있어 학교에 찾아가 교장선생님께 우리 아이들 부탁드리니 교육청 소관이다 하고 교육청에 찾아가니 학교장 재량이라 서로 미룹니다. 하여 매일 차로 등하교 시켜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기존에 통학시켜주는 아랫마을 용덕리 학부모 두분이랑 찾아가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리해서 큰 길가 용덕 1리 5키로 가까이 아이들을 트럭에 태워 내려가서 스쿨버스 타고가게 허락이 났습니다. 그러다 아랫마을까지 농로 확포장이 되어 3키로는 자전거 타고 내려가 스쿨버스 타고 갑니다.
처음에 큰 놈 한솔이가 초등학교 이학년때 가을 무렵에 전학했는데 학교도 낯설고 친구도 낯설어 자꾸 강원도로 다시 가자 해서 애먹었습니다. 해서 잘 달래고 하여 삼학년 되자 어린 한빛이를 유치원에 보내 같이 다니게 했습니다. 우리집 유치원생 일호 입니다.큰놈은 유치원 없이 곧바로 초등학교 들어갔습니다. 갈때는 형아가 자전거 뒤에 태우고 삼키로 아랫마을까지 가지만 올때는 오르막길이라 중간 중간 걸어와야 했습니다. 셋째 한샘이 때는 그래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한빛이 커서 둘다 자전거 타고 오르내리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한샘이 초등학교 들어가 형아들이 태우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어스름무렵에 군수님이 마을 시찰 나와 절골에 오시다 걸어오는 어린 한샘이를 보고 아프리카나 동남아 못사는 나라에서나 이렇게 걸어다니지 하시면서 절골까지 스쿨버스 들어오게 확포장해주셔 고생을 면했습니다. 하교길에 집에 오면서 한샘이는 세월아 네월아 입니다. 찔레철에 찔레 꺾어먹고 가을철에 밤떨어지면 밤주어먹고 해동갑하기 일쑤입니다. 동네 어른신들이 논밭 일하다 보시고
아, 한샘아
얼른 싸게 집에 가거라
그러다 어두컴컴 밤 될라
해도 들은척 만척입니다.
그런 아이가 커서 군대 가 엊그제 면회하고 왔습니다.
청송자동차고등학교 나와 읍네 1급 화성자동차정비소 엔진부에서 일하다 군 정비병 지원하여 포천 95정비대대에 작대기 하나 이병으로 군복무 중입니다.
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얘기입니다.
그래도 형아들은 둘다 대학다니기에 처음 용돈을 준것도 셋째 한샘입니다.
작년 십일월 군대가기 전에 벼 다 비고 콩꺾고 마늘 밀 심고 내년 고추심을 밭에 동생 고요랑 퇴비거름 미리 다 뿌리고 가면서도 자기 제대하면 아빠 나이 환갑이 다 된다 하며 애닯아 해 제 코등 시큰했습니다.
아이들 교육을 이런 오지에서 어찌할거냐고 청문회하며 닥달했던 친구들 음성이 아직도 제 귀에 쟁쟁 합니다.
여섯 아이들 커가며 농사도 나무도 같이 합니다.
아이들 교육은 첫째가 부모금슬이 얼마나 좋으냐고 다음은 임신중에 두 부부 얼마나 화목했느냐고 그 다음은 태어났을때 가족들에게 따뜻한 환영받으며 좋은 자연환경 속에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며 자기 몸을 움직여 자급자족하는 생활습관을 몸에 배게하면 공부는 스스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는 모릅니다. 이것이 시골에서도 도시에서서도 복받을 첫 조건이자 바탕입니다.다행히도 우리아이들이 부모와 생활하며 이런 훈련를 쌓아 군대에서도 학교생활에서도 탈없이 잘 적응하고 아직까지 잘 생활해 왔습니다. 그래 감사할뿐입니다.
오늘 저는 산불조심 순산원으로 마을 계도활동을 하고 선녀님은 종판 하우스 고추모종과 고구마 장다리에 물주고 빈공간 장만하여 남새 심을 준비합니다. 중이 올라가는 고요도 거듭니다. 초등 4학년 겨울이와 유치원생 샛별이는 자전거 타고 신나게 놉니다.
오후에는 근처 산에서 손톱으로 땔나무하여 퇴근하여 고요랑 겨울이랑 같이 실어옵니다. 샛별이랑 집사람이랑 훈장처럼 나무에 얼굴을 끍혔습니다. 모자 닮아있습니다. 그렇게 저물어 하루가 갔습니다. 하루종일 개굴 개굴 개구리 울어 산중 울립니다.
여기서 더할 뭐는 없습니다.
벗이라도 오면 담아논 약술에 막회라도 한접시 하며 봄밤을 지새워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는 일입니다.
벗이 없어도 솔바람 댓바람 불어오고
바람벽에 등기대고 어둠 벗하다 잠들면 족합니다.
그래도 새벽이면 딱새 시끄럽게 우짖어 우릴 깨우고 청딱다구리 멧비둘기 노래해 산천을 울립니다.
보석해 떠올라 서산 상서럽게 물들여 목욕하면 우리 하루 삶도 다시 시작입니다.
가슴에 새힘 차올라 해동갑 일할뿐입니다.
벗님들
그럼
개구리소리와 함께
이 밤도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