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지구 어디 한 곳도 빠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동물, 식물은 물론 글 속에도 음악은 있고, 그림 속에도 음악은 존재하니 우리네 삶 자체가 음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특히 우리 노래문화는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끼가 있어 흥이 많고 노래를 잘 불러 K-POP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일까?, 나 역시 늘 악기 하나쯤은 다루고 싶고,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래저래 악기연주는 완성시키지 못하고 그 마음만 담아 딸아이에게 온갖 열정을 쏟아 붓고는 난 늘 노래만 불렀다. 그렇다고 손들고 나가 부른 적은 없었다. 그저 시켜주면 불렀고, 부르면 잘 부른다는 칭찬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는 말이 딱 맞는 정도였다.
한 번은 대학교 1학년 때 과모임에서 어쩌다보니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부른 노래가 정수라 씨의 ‘아버지의 의자’ 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노래를 듣고는 우리 과 친구가 작곡가 선생님까지 오지랖 넓게 소개시켜 주며 어찌나 성화를 해대던지 지금은 없어진‘강변가요제’에 출전하였다. 결과는 두 번째 예선에서 똑 떨어졌는데 매일 소금과 날계란을 먹이며 한 달 동안 준비시켰던 작곡가 선생님은 수고했다는 말만 남기시곤 휘리릭 가버리셨고, 응원 하러 온다던 날 추천 했던 그 친구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날은 더운데 집으로 터덜터덜 가는 길이 어찌나 힘들던지.. 노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노래 잘 부르기란 정말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 정말 뼈가 저렸던 추억이 있다.
재미있었던 일들도 있는데 동창 모임이 있으면 2차로 이어지는 노래방에서 굳이 나서지 않아도 서로들 내 노래를 듣고 싶다고 아우성들이었다. 또한 인심 좋은 노래방 사장님이 손님 없을 때에는 공짜로 시간 줄 터이니 그냥 노래 더 부르라고 하면 신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불러댔다. 내가 진짜 가수가 된 듯 한 시간도 있었다. 친구들과 생음악 하는 곳에 갔는데 놀다보니 테이블 순서대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구들은 어김없이 나를 추켜세웠고, 으쓱해진 나는 환호와 앙크로로 몇 곡을 불러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꼴값을 있는 데로 떨었다는 창피함이 있지만 그때 당시 난 너무나 즐거워 집에 돌아와 잠을 자면서도 즐거웠었다.
시간 흘러 사건의 발단은 딸내미가 라디오 방송국 노래자랑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엄청 교만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청취자들이 이어폰을 끼고 전화기에 노래를 부르는 코너로 K라디오 방송국의 나름 전통 있는 프로그램에 난 참가한 것이다. 담당자 분이 두 번 인가 전화하셨고, 연이어 무반주 테스트 까지 받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생방송으로 연결 되는데 순간 후회도 되고, 긴장도 되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만 같았다. 드디어 이 무송, 임수 민 씨와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 나는 전국에 소개 되었다. 그 다음 이어폰으로 빅마마의 ‘체념’반주가 들려오기 시작 했다.
자신 있었고, 잘 부르고 싶었고, 잘 불러질 거라 생각했다. 잘 불러서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지내보자 다짐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도저히 귀에서 들려오는 연주의 박자와 내가 부르는 노래의 박자를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 귀에서 들려오는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내 노래는 ‘박’자에 ‘박’자도 모르는 사람이 박치 임을 자랑하러 나온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은 없어진 ‘이 무송, 임수민의 희망가요’이었는데 방송사상 과연 그런 어처구닌 없는 일이 또 있었을까 싶다. 그 당시 나는 너무 꼬이니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몇 분을 멍하니 앉아 있었지 싶다. 라디오를 끄기 전 이 무송 씨의 위로적 멘트가 귀에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전화로 노래를 부르려면 일반 노래방 시스템과는 다르니 그에 맞는 연습이 필요한 것 이었다. 청취자들이 평소 쉽고 가볍게 들어왔던 전화로 노래 부르기는 정말 피땀 흘러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청취자들의 피와 땀이 섞인 노래들 이었다. 전화와 이어폰 시스템을 충분히 인지하고 연습하여 숙달이 되었을 때 참가하는 것이 기본인데 나는 기본연습은 커녕 너무 쉽게 가볍게 본 자만의 참혹함 이었다. 너무나 창피하고 속상하여 겨우겨우 남은 일상은 꾸리다가 밤이 되어서는 엉금엉금 기어 누워버렸는데 잔다고 자는데도 눈물이 나왔었다.
충분히 날짜들이 지나갔지만 나는 한동안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부르기도 싫었다. 그러다 재작년 더위가 시작될 무렵, 가족들이 집에 없을 때 방문과 창문을 닫고, 의도적으로 노래방 웹에 마이크를 끼우고 녹음 시켜가며 노래를 불러댔다. 녹음되어 다시 내게 들려주는 내 노래는 참혹했던 방송오류 추억을 더 생각나게 해주기도 했지만 나는 괜찮아 지고 싶었다. 시원하게 노래 잘 불러서 좋았던 추억도, 지지리 박자도 못 맞추어 전국적으로 망신살 뻗은 나빴던 추억도 모두모두 아름다운 추억이니 노래로 승화시켜 이젠 행복해 지고 싶었다. 축축하게 땀을 흘려가며 얼마나 불렀을까? 무엇인가 마음이 툭 떨어지는 듯 편안해 지는 가 싶더니 저기 멀리서 행복이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다. 맞다~! 노래를 잘 못 불러도 괜찮고, 잘 부르면 더 괜찮은 것이다. 음치 박치 노래를 들으면 웃겨서 행복하고, 잘 부르는 노래는 감동받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