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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훔친돈이 아니에요    
글쓴이 : 박해원    24-02-28 21:06    조회 : 1,832
   절대 훔친 돈이 아니에요.hwp (170.5K) [2] DATE : 2024-02-28 21:06:38

절대 훔친 돈이 아니에요.

박해원

 

만화, 어린 시절 내게도 가장 우선순위였을 때가 있었다. 그 추억은 어른이 된 지금도 생동감 있게 살아있다. 주인공 캐릭터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아름드리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통쾌한 장면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캐릭터들을 보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열 살 아이의 심장도 함께 끓어올랐다. 불굴의 의지로 승리한 캐릭터에게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적도 있었고, 너무 웃겨서 웃다가 옆 사람을 의식하며 참았던 기억들, 억울한 도망자의 긴박함에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함께 뛰기도 했었다. 풀리지 않은 난감한 문제 앞에 서면 열살 아이는 한껏 상상력을 동원하여 문제해결사가 되기도 하였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서부 만화. 권총을 차고 화려한 장식의 혁대를 찬 폭력 만화, 공포 만화, 순정 만화, 재치와 웃음을 자아내는 꺼벙이 캐릭터 만화. 엄마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만화 사랑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4학년 여름, 일요일 아침이었다. 밤새 폭우가 쏟아진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거친 비는 조금은 잦아들었지만, 빗방울은 그치지 않았다. 이른 아침 날이 밝을 무렵 사촌 올케가 들어왔다. 어젯밤에 나간 일곱 살 된 인수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단다. 이른 새벽 동이 트기도 전부터 인수를 찾아 나서야 한다며 만홧가게를 봐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만홧가게를 봐주라고 했다. 난 솔직히 아이를 찾아다니는 부모의 안타까운 심정까지는 절절하게 와닿지 않았다. 7살 조카와는 데면데면 지냈고, 당시 시골 아이들은 엄마의 손길에서 방목되다시피 성장했던 환경이었다. 자유롭게 놀다가 늦은 시간이면 누구네 집에서 자고 왔던 시절이기도 했다.

만홧가게를 봐주면 하루 종일 보고 싶은 만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새벽을 깨우며 달려갔다. 만홧가게는 살림집이 딸린 점포였다. 올케언니는 몇 가지 지침을 주고 곧장 서둘러 나갔다. 손님이 오면 돈을 받아서 돈통에 집어넣고, 거스름돈은 돈통에서 꺼내 주면 되고, 손님들이 만화를 본 후에는 종류대로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리해 두라는 지침이었다. 나는 그 시간부터 며칠 굶주린 사자처럼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배가 고팠다. 밖엔 여전히 세찬 비의 여진처럼 소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흩트려 놓은 만화책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까마득히 잊고 만화에 심취했다.

 

막내야. 가게는 잘 보고 있냐?” 엄마였다. 점심때가 한참 지났는데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엄마를 보는 순간 갑자기 배가 더 많이 고파왔다. 엄마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새벽같이 빈속으로 나가서 저녁이 다 돼가는데 아무것도 안 먹었느냐고 재차 물었다. 엄마의 표정은 내가 뭔가 불쌍하고 안쓰러워야 할 상태라도 되어 줘야만 할 것 같았다. 엄만 돈통에서 돈 꺼내다가 빵 하나 사 먹으라고 했다.

엄마, 이건 우리 돈이 아니잖아.”

엄마는 올케언니한테 말해줄 테니 20원만 꺼내가서 빵 하나 사 먹어도 된다고 거듭 말했다. 나는 그래도 되느냐고 한 번 더 확인하며 물었다. 엄마는, 내가 20원을 가져다가 빵을 사서 먹어도 된다는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귀에 쏙쏙 들어왔다. 새벽부터 와서 가게 봐주고 저녁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텐데 빵 하나쯤 사 먹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다. 혹시 모자라면 10원 더 가져가도 된다고 허락했다. 꼭 말해줘야 해줘야 한다는 확답을 요구하는 나에게 엄만 어린애가 뭘 그리 생각이 많냐며 면박을 주고 나가셨다. 엄마가 나가시고 내 머릿속에는 20원과 보름달 빵이 어른거려서 만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힘이 없었다. 아이들이 보고 간 만화책을 종류별로 책꽂이에 꽂고 의자와 테이블 정리를 해놔야 한다. 올케언니가 언제 올지 몰라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하얀 설탕 크림이 속을 가득 채운 달콤하고 보드라운 보름달 빵을 먹는다는 것은 모든 아이들의 로망 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허락을 받았지만, 돈통에 손을 넣어 가져가는 것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마가 돈통에서 꺼내 주고 갔더라면 한결 마음이 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보름달 빵은 계속해서 생각이 꽉 찬 나의 머릿속을 흔들고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뱃속을 흔들고 돈통에서 돈을 꺼내야 할지 말지 망설이는 내 심장을 유혹했다.

돈통에서 20원을 꺼냈다. 평소와 다른 심장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만큼 쿵쾅거렸다. 다시 돈통에 집어넣을까도 생각했다. “아니지, 난 분명 엄마에게 허락받았어.” 보름달 빵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엄마가 말해준다고 했으니 엄마 믿고 절대 흔들리지 말자. 나는 다짐하며 보름달 빵을 파는 옆집 가게로 갈 참이었다. 입안에 사르르 녹는 보름달 빵을 생각하니 벌써 입안 가득 침이 고여 왔다.

 

아뿔싸! 운명의 장난이라 했던가, 그 순간 올케언니가 충혈된 눈으로 혼자서 들어왔다. 보름달 빵이 머릿속에서 잠시 후순위로 밀려났다. 열 살 아이의 마음속에도 순간 뭔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다.

손안에 들어온 20원이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심장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금 전에 보름달 빵 먹을 생각에 한껏 부풀었던 마음은 어디에 가 있나. 난감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이 더부룩했다. 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은 한 겹 더 두껍게 생각을 추가했다. 올케언니는 돈통을 들여다본다. 어찌해야 할까. 다시 돈통에 집어넣을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진퇴양난에 처했다. 20원을 쥐고 있는 손안에는 이미 땀 범벅이 되었다. 고민 끝에 화장실로 가서 숨길 곳을 찾아봤다. 마땅히 없었다. 속옷 고무줄 부분을 한 겹말아 접어서 숨겨 보았다. 그런데 동전이라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방법도 아닌 듯하여 다른 방법을 찾았다.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맞아, 신발 속에 숨기는 거야,’ 양쪽 신발 속에 각각 10원씩 숨기고 화장실을 나왔다. 올케언니에게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말해야 하겠다. 올케언니가 나를 부른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막내 아가씨, 이쪽 만화책 정리하고 저쪽 방에 있는 만화책 좀 꺼내 오렴.” ! 저쪽 방에, 그러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이런 난감한 상황에 부닥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도 없고 머릿속은 온통 새하얘졌다. 신발 속에 숨어 있던 동전도 잔뜩 겁을 먹고 있다. 나는 올케언니의 명령에 !”라고 대답은 했지만, 다시 화장실에 가야 하나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을까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서성거렸다. 올케언니가 짜증이 난 어투로 쏘아붙였다.

안 들리니? 뭐해, 저쪽 방에 있는 만화책 좀 꺼내 오라는데.”

난 더 이상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언젠가 보았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만화책을 꺼내 오라는 과제를 안고 저쪽 방 쪽으로 갔다. 신발을 벗을 수가 없었다. 신발을 벗지 않은 채로 엉금엉금 기어서 들어갔다. 뒤에서 지켜보던 올케언니가 소리친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지.” 무릎을 꿇어 뒤로 젖힌 발을 그대로 공격해서 인정사정없이 신발을 벗겨 버렸다. 신발은 대책 없이 내동댕이치듯 벗겨졌다. 신발 하나가 벗겨지는 순간 야속하게도 10원짜리 동전은 너무나도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나선형으로 몇 바퀴를 돌고 돌아 또르르 구르며 납작 엎드리며 멈췄다. 다른 쪽 신발도 거의 동시에 벗겨졌다. 땡그랑, 역시 10원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왜 그토록 빙빙 돌면서 오래도록 나뒹구는지 약속하기 그지없었다. 나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새파래졌다. 심장이 멎을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절대 훔친 돈이 아니에요.” 마음속으로만 외쳤을 뿐 온몸이 얼음이 되어 버렸다.

 

인수는 이틀 후에 강 하류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열 살 아이는 죽음이 무엇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죽음이 이토록 아프고 슬픈 것인 줄은 처음 알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죽었다는 사람의 소식은 늘 두렵고 아팠다. 인수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고 오빠 내외는 몇 날 며칠을 통곡하며 인수를 그리워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오빠 내외는 멀리 도시로 이사 했다. 한동안 올케언니와 오빠를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친척들 모임이 있는 날엔 올케언니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숨어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된 후 친척들이 모인 자리였다. 내게는 감추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올무였다고 그때의 상황과 난감했던 열 살 아이의 심정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올케언니는 아이를 잃은 슬픔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괜히 이야기했나 보다. 겨우 잊고 살아가는 올케언니의 가슴속에 아프게 묻어두었던 인수를 불러왔다는 것이 더 미안했고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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