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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시간    
글쓴이 : 이동연    24-07-15 20:20    조회 : 2,472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TV 프로의 한 장면이다.
  "윌리엄! 열 시에 병원 가야 해. 십 분 전 까지 게임 끝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쳐다보고 아빠 해밍턴은 방으로 들어갔다.
  병원 가기 싫어 시무룩했던 아들 윌리엄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며칠 전 시계가 멈췄다며 건전지를 갈던 아빠의 모습이 섬광처럼 스쳐 간 때문이다.
윌리엄은 소파에서 내려와 들킬세라 방 안의 동정을 살피고 벽시계의 건전지를 뺐다.
주도면밀하게 아빠의 휴대전화도 거실 탁자 밑으로 숨기곤 원 위치로 돌아와 천연덕
스레 게임을 다시 했다.
  얼마 후, 거실로 나온 해밍턴은 윌리엄과 벽시계를 번갈아 쳐다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네 살배기의 깜찍한 사기극(?)에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사람에겐 누구나 일생에서 시간을 멈추고 싶었던 때가 한 번은 있지 않을까.
  정상에 올라 내려오고 싶지 않을 때, 도망간 끝이 낭떠러지일 때,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야 할 때, 숫총각이 첫 키스의 황홀감을 맛보는 순간, 어음 기일은 돌아오는 데
통장 잔액은 없을 때, 공부는 안 했고 시험일은 목전일 때, 암 환자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많다. 아마도 절정의 기쁨이나 극한의
고통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싶다.

  시계를 멈추어서 시간이 멈춘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쉽고 편할까.
시계는 시간을 재는 기계장치에 불과하고 시간은 인간이 나누어 놓은 단위일 뿐이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흐르는 시간에는 닻조차 내릴 수 없다.
죽음만이 시간을 멈추게 한다. 죽은 자의 시간만 멈춘다.

  아버지는 실향민이셨다. 실향민!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안타까운 이름이다.
  6.25 전쟁 당시 일본 유학을 마친 큰할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서울에 계셨다.
친할아버지가 형 대신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책임졌다.
공산주의가 싫어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친할아버지는 누나와 동생 부부, 조카들의 
가족과 맏이인 아버지를 챙겨 서울로 먼저 보냈다. 가산을 정리한 후,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남은 자식들과 함께 곧 서울로 올라갈 요량으로.
  그러나 영영 오시지 못했다. 부자는 그렇게 생이별했다.

  어린 시절, 명절이면 큰할아버지댁에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차례도 지내고, 세뱃돈
받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공부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잔치 같아서 나는 그저 좋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안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우리 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고 놀랐을 때, 엄마가 눈짓으로 말했다.
  "북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러시는 거야. 우린 모른 척하자."
  명절에 모두 모여서 부모님과 함께 빈대떡이며 만두며 고향에서 먹던 음식을 나누면서
즐거워하는 사촌 형제들 옆에 앉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부모님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명절이 아버지를 더욱 힘들고 외롭게 했으리라.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직계 가족 하나 없이 혈혈단신 월남한 셈이다.
곱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백부와 숙부가 울타리가 되어준 들,
친부모만 했으랴. 곱게 자란 탓에 생활력 없는 아버지가 이 험난한 세상을 홀로 헤쳐나
가야 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까.
  힘든 모습을 우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셨을까? 혼자라서 아버지는 우리
5 남매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셨나 보다. 아버지의 큰 사랑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고아
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 우시는 줄로만 알았다.
삶의 고단함을 나누고 위로받을 사람, 맹목적으로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절실했던 서러움
에 북받쳐 나오는 울음이라는 생각은 커서야, 한참 커서야, 오십 세도 더 넘어서야 했다.
참 무심한 자식이었다. 자식들은 언제나 그렇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쯤, 보고 싶은 사람 없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실낱같은
목소리로 아버지가 대답하셨단다. '어~ㅁ 마~'라고.
  엄마가 보고 싶단다.임종을 앞둔 여든넷의 노인이 엄마가 보고 싶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북에 두고 온 할머니를 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다.

  가슴 깊게 묻어 둔 아버지의 시간은 스물두 살에 멈춰져 있던 건 아닐까.
부모님과 함께 단란하게 아침밥을 먹고 고향을 떠나온 그날의 시간에 맞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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