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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한 상자    
글쓴이 : 박병률    15-05-30 07:08    조회 : 7,027

                                 사과 한 상자

                                                                         

  할머니가 손수레에 폐지를 가득 싣고 언덕을 오른다. 내가 뒤에서 밀며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8학년 7반이야’ 하시며 앞 이가 다 빠진 모습으로 환하게 웃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거리고 머리에 비녀를 꼽고 한쪽 다리를 절름거린다. 손수레를 끌 때 거의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고 무단 횡단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소문에 따르면 할머니는 아이엠에프 때 의류사업이 망하면서 그 충격으로 남편은 죽고, 자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폐지를 팔아 모은 돈 일부를 장애아동 복지 시설에 기부한다고 했다.

  실내 장식 가게를 하는 나는, 사정을 알고 난 뒤부터 공사 현장에서 나오는 헌 장판, 철문이나 창틀을 한쪽에 모아두었다. 예전 같으면 일꾼들이 고물상에 팔아 막걸리 한잔하던 터였다. 어느 날 퇴근길에 내가 고물을 싣고 나오는데 어떤 일꾼이 보았다. 다음 날 가게에 나갔더니 표정들이 한결같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일꾼들과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일 공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도중에 오늘 처음으로 나온 사람이 횡설수설하며 ‘사장이 짜다’는 것이다. 일용직 일꾼을 쓰다보면 다음에는 다시 안 볼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내용을 들어보니 내가 어제 고물을 싣고 나갈 때, 고물상에 고물을 파는 줄 알고 구두쇠라며 수군거렸단다.

  난 오해를 풀기 위해서 폐지 줍는 할머니 사정을 들려주었다. 그 집 마당에 짐을 내려놓고 나가는 나에게 할머니가 “고마워유, 이런 늙은이를 생각해주니 염치가 없구먼유.” 그러시며 냉장고에서 음료수 한 병을 꺼내주더라고 했다. 그날 이후 일꾼들 사이에 경쟁이 생겼다. 철근 토막 하나라도 할머니에게 가져다주려고 한다. 나 역시 버릇처럼 신문지나 책 등을 보면 할머니가 떠오른다.

  하지만 길을 다니다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폐지를 줍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내가 잘 아는 분, 집을 몇 채를 지니고 있는 동네 어른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닌다. 어느 날 그렇게 모은 잡동사니를 길바닥에 풀어놓고 분리하고 있었다. 철인지 스테인리스를 구별하기 위하여 자석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자석은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엔 무감각이고, 녹이 슬어 볼품없는 철은 끌어당겼다. 이렇듯 성질이 같은 것끼리 작은 봉지에 담아서 큰 자루 2개의 속을 가득 채웠다. 짐자전거에 산더미처럼 올려놓고 밧줄로 묶을 때 “어르신, 그 연세에 힘들지 않으세요?” 라고 물었더니 지금도 쌀 2가마 정도는 자전거에 거뜬히 실을 수 있다고 한다. 고물을 모으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살림에 보탠다고 한 술 더 뜬다.

  몸이 성한 사람이 동네를 한바탕 휩쓸고 가고, 할머니는 페트병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손수레에 주렁주렁 매달고 간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위해 우리 에어컨을 신형으로 교체하면서 실외기와 20m쯤 되는 동 파이프를 돌돌 말아서 창고에 넣어두었다. 집 주변에 원룸이 많아서인지 쓸 만한 게 자주 나오는 편이다. 눈에 띄는 데로 책, 신문지, 헌 옷 등을 차곡차곡 모았다.

  때때로 방 창문을 열고 골목을 바라보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우리 집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중 나가 그동안 모았던 것을 손수레에 실어주고 창고 열쇠 하나를 할머니 허리끈에 매 드렸다. 설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름 없는 사과 한 상자가 집 앞에 있었다.

                                                                       좋은생각- 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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