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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님 말고    
글쓴이 : 박영화    20-08-21 00:16    조회 : 5,404

아님 말고

 

박영화

 

저 이 계약 안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벌떡 일어나 남편에게 빨리 나가자는 눈짓을 보내곤 밖으로 나왔다. 삽시간에 양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부동산 중개인이 재빨리 따라 나왔다.

아이, 참으세요. 저 사람 원래 말투가 저래요.”

아니오, 안 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이렇게 합니까? 에이전트 역할이 뭔가요? 주인하고 다 상의되었다면서요?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다른 가게 찾아주세요.”

나는 단호했고, 돌아오는 차 안은 안개가 가라앉은 듯 조용했다.

 

시애틀 북쪽에 어설픈 둥지를 틀고 나니, 다음 단계는 바깥세상으로의 전진이었다. 철벽 옹성처럼 단단한 이국의 장벽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감에 한 발 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주춤거리며 견디다 보니, 결코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곳에 작은 틈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살아 내야할 용기였다.

타국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졌지만, 곧 대학에 입학할 큰 딸의 학비문제는 아끼고 쥐어짜 낸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남의 집 살이 경험을 토대로 내 식당을 찾아 나섰다. 매매금액 전체를 지불할 수 없었던 나는 우선 반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이자와 함께 매달 갚아나가는 오너 캐리를 제안했다. 매도인 입장에서야 대금 전체를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급매를 원했던 그쪽 사정도 어지간히 복잡한 모양이었다. 양측의 조율은 부동산 에이전트를 통해 이루어졌기에 그들을 정식으로 마주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막상 서류에 사인을 하려니 주인장 내외의 행동은 달랐다. 돈을 쪼개서 받으니 손해가 많고, 좋은 가게를 너무 쉽게 얻으려 하는 것 같다며 남편과 나를 향해 얄궂은 질타를 가했다. 짐짓 무안하고 민망했지만, 그 정도는 참아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예의 없는 태도에 나의 인내심은 힘을 잃고 말았다. 대박이 날지, 쪽박을 찰지 모를 모호성에 전 재산을 쏟아 부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날의 결단은 중요했다.

에이, 또 찾아봅시다. 우리 것이 되려면 될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몇 달 동안, 도시 구석구석을 헤매어 신중히 선택한 장소였기 때문에, 또 다시 수고를 해야 한다며 걱정하는 남편에게 엷은 위로를 건넸다.

 

영화 올드 보이친절한 금자씨로 알려진 박찬욱 감독 딸이 중학교에 다닐 때 숙제가 있었단다. 집 가훈이 뭐냐는 딸의 질문에 아빠는 아님 말고라고 했다. 목적 없이 인터넷 공간을 헤매던 어느 날 이 네 글자를 발견했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당당한 말인가. 엉겨 붙은 삶의 매듭을 풀어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마음 졸이지 말라는 조언이자 자유로움이었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던 내 어깨를 툭 치며, 잠시 긴장을 멈추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두어 달 쯤 지나자, 지난 번 계약 직전까지 갔던, 주인한테서 원하는 조건에 식당을 팔겠다며 연락이 왔다. 그는 정중했고, 나는 받아들였다. 아님 말고 이론에 심취한 나머지 몇 달 늦게 가게를 시작했지만, 박 감독에게 빌려온 이 정신은, 모눈종이처럼 촘촘했던 머릿속과 삶의 방식 사이에 쉼표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이미지가 머무르거나 스쳐 지나간다. 1500그램의 뇌의 한 부분, 그것도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는 전두엽 일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극영화가 단 하루 동안 상영되는 것이다. 스크린 속에는 주인공인 나를 중심으로 조연과 수많은 엑스트라로 분주하다. 결국 시나리오, 연출, 주연배우가 나 자신인 1인극일 뿐이다. 게다가 수도 없이 재방송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대부분의 필름들이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거나, 채 다가올지 말지 모를 미래에 대한 염려들이다.

다음 달에 직장에서 해고되면 무얼 먹고사나. 학교에 간 딸아이가 친구들과 싸우지 않을까. 며칠째 반복되는 헛구역질이 혹시 암이 아닐까. 이것보다 좋은 가게를 찾지 못하면 어째야 하나. 온갖 세상사를 품 안에 끌어안고 떨어뜨릴까 불안해한다.

 

창밖을 바라보며 첫눈을 기다렸던 맑은 청년시절부터, 세상은 내가 꿈꾸던 대로 되지 않음을 알았다. 완벽한 기회는 하나둘씩 나를 비켜갔고, 남겨진 초라함과 뒤쳐짐은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했다. 실패와 동거하며 너 때문이라고 수도 없이 원망을 털어놓기도 했다. 좌절의 뒤끝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감정을 지나치게 소비하고, 정작 중요한 일을 놓치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내가 하면 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다양한 버전의 드라마를 온종일 돌려가며 자신에게 작은 틈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고달픈 삶을 자초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스스로 되뇌는 아님 말고는 좀 천천히 가도 된다며, 게으른 여유를 선물로 주는 듯 했다. 이것은 실패의 두려움에 대한 변명일수도 있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할머니의 따스한 음성이었다.

 

엄마, 나 회사에서 적응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이 번 일이 잘돼야 할 텐데, 걱정이네.”

난 언니처럼 좋은 직장 못 찾을 거 같아요.”

출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큰딸아이가 초조함을 보일 때, 다음 프로젝트에 온 신경이 곤두서있는 남편에게도, 앞날에 대한 불안감에 주저하는 막내에게도, 나는 아님 말고라 말해주었다.

맘껏 변명하고 위로하다 남보다 늦게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은 진지하지 못한 밉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누구도 활화산처럼 치닫는 내 감정의 정점을 알 수는 없다. 오직 자신만이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다시 마음이 불안해 질 때면 그때마다 아랫입술 삐죽거리며 중얼거릴 것이다. ....

 

 

2018. 10 책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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