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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추여행    
글쓴이 : 박희영    18-01-26 19:34    조회 : 5,139

만 추 여 행

                                                                                                              박 희 영

11월은 떠나게 한다. 싸늘한 바람에 실려 한 잎 두 잎 내려 앉은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기쁨은 오롯이 나만이 갖는 달콤함이다. 쓸쓸하고 황량한 벌판에 서면 센티멘탈한 마음은  어느덧 카타르시스가 되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희열이 있다.

봉화에서도 더 깊이 들어 간 오지, 거대한 천인단애가 억겁의 모진 풍상을 이겨 낸 세월을 안고 위엄과 체통을 지키며 버티고 있다. 그 위엄에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강물은 해넘이의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며 말없이 흘러간다.

산은 오색의 단풍에 지쳐 겸허히 옷을 벗고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우릴 품어 준다.

청량산 줄기의 깎아지른 거대한 절벽 아래로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고 강변의 은빛 모래, 아득한 저 가을 하늘에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 싸늘한 바람에 실려 가랑잎들은 새삭거리며 춤을 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은 두려움과 동시에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낙엽 진 벌판에 앉아 바라보는 절체절명의 풍광 속으로 우리는 서서히 침몰해 갔다. 늦가을이 주는 이런 센티멘탈을 즐기려고 떠난 것인 바에는 친구들과 함께 그 감정에 충실하게 시간을 향유하면 되는 것이다. 쓸쓸하고 황량한 애수의 만추에 초대되었다.

낙엽을 털고 일어나 ‘예던 길’을 걸었다. 예던 길이란 퇴계 이황이 한양에서의 벼슬을 마감하고 이 곳에 내려와 자연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던 사색의 길이다. 청량산과 낙동강 사이를 따라 난 길을 걸으며 청량산의 운치를 찬탄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 가는 듯한 아름 다운 오솔길인 예던길을 퇴계가 걸었던 진리의 길을 좆아서 걷는다는 이 기쁨을 무엇에 비할소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앞에 두고 뒤로는 청량산 줄기가 둘러쳐 있는 풍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한 농암종택은 사랑채, 긍구당, 애일당, 강각, 별채등 9동의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고즈넉하게 앉아있다. 강호시인 농암이 ‘굽어 보니 천 길 파란 물, 돌아 보니 첩첩 푸른 산...’이라며 어부가를 불렀음직하다.

지글지글 끓는 온돌 위에 빨강, 초록의 고운 양단 이불이 깔려 진 사랑채에 모여 앉아 자유부인이 된 여인들의 방담이 꽃을 피우기 시작할 무렵 ‘사랑채 손님들, 여기 나와 보세요!’ 하는 종부의 약간 들뜬 목소리에 후다닥 마당으로 나가보니 캄캄한 밤하늘에 함박눈꽃 같은 별송이들이 총총했다. 고기 반, 물 반이라더니 밤하늘엔 별 반, 하늘 반이었다. 서울내기인 난 그런 별꽃들을 본 적이 없었다. 인적 없는 낙동강변의 고택 마당에서 바라 본 별송이 송이들...

알퐁스 도데의 ‘별’이 떠올랐다. 목동과 스테파네트가 본 별도 저랬을까?  어두워진 마당의 평상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우리는 늦가을의 찬란한 밤을 노래 불렀다.

아침이 되어 예의 종부가 ‘식사하세요~’하는 소리에 안채에 건너가니 종부의 밥상이 얌전하게 차려져 있었다. 주부들에게 ‘제일 맛있는 밥은?’하면 ‘남이 해주는 밥!’이라는데 이런 정성과 예를 갖추고 종부의 내림솜씨를 맛 볼수 있으니 행복했다.

부추콩가루찜, 북어보푸라기, 북어강정, 안동 간고등어구이, 배추전, 두부구이, 콩나물, 시래기나물, 하루나나물, 장아찌, 계란찜, 된장국등이 차려있었다. 향토음식의 특색이 살아 있고 내륙지방의 지혜가 엿보이는 정갈한 음식을 대접 받으니 한국의 유교적 전통에서 비롯 된 종부의 삶을 문화재급의 차원으로 격상시켜 잘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충분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신기할 따름인 인내를 감수해야 할 종갓집 제사 문화와 더불어 집안의 체통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양립된 책임은 그녀들의 어깨를 짓누르기에 충분한 희생이다. 원래 기름진 음식보단 정갈한 나물반찬을 좋아하는 나는 성찬을 대접받은 충일함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청량산 트래킹 채비를 하곤 길을 나섰다.

도산서원을 지나 그림같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걸어 가는 35번 국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호젓함에 반하여 벤치에 앉아 그림 속에 앉아 본다. 이런 절경에서 서생들은 공부가 되었을까?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자기 감정을 절제하는 옹골찬 정신 수련으로 학문에 정진해야만 할 터인데 과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와서 공부를 한다면 아마도 두고 온 인연에 대해 산란해진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울 듯하다. 눈 속으로 빨아 들인 수려한 강줄기의 잔상과 감흥이 마음으로 남아 있는데 발걸음은 산 입구 입석으로 들어섰다.

봉우리마다 각각의 모습이 다르지만 병풍처럼 둘러 쳐진 36개 봉우리의 조화로운 모습과 웅장한 기개는 과연 소금강이라 할 만하다. 봉우리 기슭에 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청량사가 천하를 굽어 보며 자리하고 있는데 올라 가는 동안에 이미 마음은 세속의 번뇌가 한갓 헛된 꿈이라는 깨달음이 생길 만 한 시간이다. 하늘 다리에 도착했다. 하늘 아래 제일 높은 곳에 다다르니, 세상에서 마음 끓이며 사는 모든 문제가 먼지나 티끌에 불과한 것임을.... 망망한 산하를 바라보며 다 내던졌다. 던져 버렸다.

성성했던 푸르름도, 단풍의 화려함도 이젠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아련해진 바랜 잎사귀들, 바람 한 줄기, 스산하게 불어 온다. 내면의 성찰을 하기 위함인가, 산은 아낌 없이 다 내어 주고 겨울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약동하는 봄을 위해.

산의 품에 안기며 산을 느끼고 산과 호흡하며 닮아 가는 시간이었다. 뻐근해진 다리를 쉬어 가며 하산하는 나에게 산이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잘 익어가라.....

18. 1.


공해진   18-01-29 10:57
    
박희영 선생님!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묘사가 좋네요.
계속 쓰시고 의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박희영   18-01-30 15:39
    
공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기는 다 나으셨겠지요?
박영화   18-01-29 23:00
    
11월 어느날, 늦가을 속으로 떠난 여행의 풍경과 감상의 표현이 훌륭하시네요.
각 문단마다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잘 읽고갑니다. ^^
     
박희영   18-01-30 15:39
    
박선생님, 감사합니다. 힘내라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네요. 선생님 글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이승종   18-02-01 05:31
    
우리 분당반의 샛별 이십니다.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됩니다.
계속,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이화용   18-02-01 09:42
    
11월은 글을 쓰게 하는 계절이지요.
게다가 만추 여행이라니....
저도 11월 앓이를 무섭게 했었습니다.
<11월의 기억>연작 4편을 몇 년에 걸쳐 쓰고 나니 이젠 좀 벗어나게 되더군요.
五感이 활짝 열려 있는 박희영샘,
2017년은 최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좋은 글 많이 보여주세요. 기대가 큽니다.
김정미   18-02-01 11:05
    
박희영 선생님!
합평반에 입성을 축하 축하 드립니다.
저도 안동을 다녀온 후로
잔상이 오래 남아있답니다.
내 언젠가는 한 편 풀어 놓아야 할것 같습니다.
설샘과 동기시며
이승종샘과 문영일샘의 짝꿍들이신 선생님들
계속해서 풀어 놓으세요.
11월에 행운의 여신이 방긋 웃어줄지도~~~
기대합니다.
문영일   18-02-01 12:59
    
준비된  사수 납시었다.
참 잘 쓰십니다.
내공  깊은 문학가가  빚어놓은 명문장들.
합평시간. 코멘트가 예사롭지 않다했지요.
이승종 선생님.짝궁님도...
두 분  모두  걸죽한 수필가.
첫 등재. 축하하며  건필하십시오
박희영   18-02-01 15:28
    
애정어린 격려 감사합니다. 웬지 발가벗겨진 기분이라  부끄럽네요.11월의 감성을 아는 분은 아시죠? 달콤씁쓸한 이별의 감정을...
강경신   18-02-06 16:20
    
선생님을 뒤따라 걷는 기분이 드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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