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이 한 마리
표 경 희
집에서 사무실까지 정상적인 교통상황이라면 차로 30분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회사 근처에 산업단지로 연결되는 터널이 뚫리면서 차량정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출근길 1시간은 예삿일이 되었고, 어떤 날은 브레이크를 너무 많이 밟아서 무릎이 아프기까지 했다. 그래서 20분 먼저 나서서 지하철 출퇴근을 시작한 지 두 달 남짓 되었다.
역에서 청사까지 15분 남짓 걸어서 올라오는 길 한쪽 옆은 산이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담쟁이덩굴도 무성하고, 장미도 피었다 지고, 진한 풀냄새와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면서 걷는다. 어린 시절 외갓집 시골 돌담길 생각도 나게 한다. 바로 옆 차도를 달리는 차들 매연만 없으면 정말 좋겠지만 도심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곧게 뻗어야 할 산기슭의 어린 대나무가 큰 나무에 밀려 수양버들처럼 휘어진 것도 보고, 보도블록 사이에 난 풀들에게 ‘너희도 살아보겠다고 고개를 내미는구나’ 하면서 은행나무 가로수 그늘을 걷는 이른 아침 출근길은 상큼하다.
어느 날 출근길에 무심코 발밑을 보니 송충이 한 마리가 그 많은 발로 얼마나 맹렬하게 달려오는지 놀래서 피하느라 허둥거렸다. 꼭 전투병처럼 앞을 향해서 돌진하는데 순간적으로 어느 쪽으로 피해야 할지 겅중거리다가 혼자서 피식 웃고 말았다. 내 기억에 송충이는 빨간 점이 있는 커다란 놈이 소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아스팔트 보도를 그렇게 맹렬히 달리는 놈은 처음 보았다. 이렇게 강렬한 인상의 송충이를 가까이에서 본지가 언제인가 손꼽아보니 40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뺑뺑이 1세대인 우리는 중학교 입시가 없어져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았다. 집 근처 학교를 두고 멀리 공동묘지로 유명한 망우리 근처의 신설학교에 입학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려면 논 밭길을 지나야하므로 여름엔 장화가 필수품이었다. 최고학년이 2학년으로 산 밑에 학교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었지 운동장이나 다른 시설들은 갖추는 중이었다. 체육 시간은 운동장에서 돌 골라내는 시간이었고, 특별활동 시간에는 뒷산에서 송충이를 잡았다. 특활이 있는 날의 준비물은 병이랑 나무젓가락이었다. 한 학년 전체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3분의 1 정도 물을 채운 병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소나무 가지에 붙어 있는 송충이를 나무젓가락으로 잡아서 병에 채우는 것이 특별활동이었다. 그때 송충이는 녹색 몸체에 빨간 점이 줄줄이 박혀있는 것이 어찌나 크고 징그러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몸이 움츠러든다. 병에 송충이를 잡아서 넣기는커녕 머리 위나 옷에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소나무 기둥을 타고 오르는 놈을 발견하면 한쪽 눈은 감고 최대한 몸을 멀리해서 나무젓가락을 가져다 대니 제대로 잡힐 리가 있었겠는가? 나무에 잘 있는 놈을 괜히 건드려서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놓고는 피하느라고 난리를 치곤했다.
요즈음 세대들이 들으면 무슨 구석기 시대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른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산천은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장마철에는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골골이 모여 큰물이 되어 내려왔다. 매년 산사태와 홍수로 여름 장마철만 되면 이재민이 생겼다. 산에 나무가 없어서 되풀이되는 악순환 고리를 끊는 일이 절박했다. 국가에서는 산림녹화 정책으로 나무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학교에서도 뒷산의 소나무 보호를 위해 송충이 퇴치 활동에 학생들을 동원했을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운동장에서 돌이나 줍고 산에서 송충이나 잡는 곳이 무슨 학교냐고 볼멘소리로 투덜대긴 했지만, 부모님께 전달해서 문제시되거나 한 적은 없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산을 오르면 산등성이에 산림녹화나 산불조심이라는 큰 글씨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선배 직원에게 들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대화에서 고사성어를 자주 쓰는 직원이 있다. 본인의 박식함을 자랑하려는 것이었는지 습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선배가 고사성어를 사랑하는 직원과 산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했다. 산행 중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 직원에게 심조불산이라는 고사성어도 아느냐고 물었단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직원이 몇 번을 되뇌며 그 뜻을 한참 고민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심조불산이 무슨 뜻인데요?” 했더니 “표 군아!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거꾸로도 한번 생각해봐라.” 했다. 아~ 산불 조심하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공직사회에 남녀구분이 심했다. 7~8살 차이가 났던 선배님은 내게 ‘표 양’이 아니라 남자 후배에게 하듯이 ‘표 군’으로 부르면서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 덕택에 나는 편하게 맘껏 일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선배님은 목 디스크 환자여서 목이 안 돌아갔다. 뒷자리의 윗사람이 부르면 목을 돌려서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는 탓에 건방진 놈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회전의자로 바뀌어서 의자만 돌리면 되니까 편하다고 하던 분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사이드미러를 볼 때는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서 보면서도, 3보 이상 보행금지 원칙을 지키는 운전의 달인이셨다. 운전이 서툴던 내가 출근길에 사중 추돌이라는 대형 사고를 쳤을 때는 우황청심환을 한 병 사 주면서 “마셔라. 표 군아,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보험회사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다.” 하던 분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술자리는 마다하는 법이 없었고 주량도 만만치 않았지만, 다음날은 말짱하게 정시출근으로 젊은 직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 날도 직원들과 술을 마시던 중에 화장실에 갔다가 넘어졌는데 목 디스크였던 경추가 많이 다쳐서 전신 마비가 되었다고 했다. 바로 전날까지 멀쩡하게 옆자리에서 나란히 근무하던 분이 전신 마비라니 기가 막혔다. 병문안이 제한되는 중환자실이라 순서를 기다려서 몇 명이 함께 들어가니 하얀 얼굴로 눈만 깜빡이며 누워계셨다. 눈물을 글썽이는 내게 눈빛으로 ‘표 군아,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지내고 우리와 이별했다. 장례 미사에서 선배님의 사연 많고 힘들었던 삶이 너무 안돼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침 출근길에 만난 작은 송충이 한 마리가 나를 중학교 철부지 소녀 시절의 어리숙하고 풋풋했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또 하얀 얼굴로 선하게 미소 짓던 선배님과의 오래전 소소했던 일상을 불러내어 아련한 그리움에 젖게 했다. 한참 잊고 지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현재의 시간과 인연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다시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나이가 더 들기 전 먼 길을 걸을 수 있을 때, 나중에 꺼내서 곱씹을 추억으로 좋은 경치나 이색적인 볼거리가 있는 해외여행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모두 부질없는 착각이었다. 정말 중요한 ‘지금-여기의 삶’을 또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