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품은 집
이지영
2023년 봄, 경기도 파주로 역사 기행을 다녀왔다. 마지막 일정으로 방문한 곳은 ‘평화를 품은 집’으로 파주시 파평산로에 있다. 멀리서 보니, 산이 그곳을 둘러싸 안은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차에서 내려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 길옆 쪽에 핀 들꽃을 감상하며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다.
평화를 품은 집 테라스에서 야외 풍경을 둘러보며 잠시 쉬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제노사이드 역사 자료관 방문이 일정에 있었는데, 그 자료관은 ‘평화를 품은 집’ 안에 있었다. ‘어, 제노사이드가 뭐지?’ 이 말을 처음 들었다. 자료관에 들어가기 전, 해당 자료관을 만든 해설 강사의 설명을 들었다. 제노사이드란 특정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절멸할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학살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통 집단 학살(집단 살해), 인종 학살(인종 살해)이라고도 한다. 인종 또는 부족을 뜻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뜻하는 라틴어 ‘-cide’의 합성어이다.
강사는 제노사이드를 이야기해야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왜 자신이 제노사이드 자료를 모으고 어떻게 자료관을 만들었는지, 제노사이드 피라미드 이론 등을 이야기했다. 강사는 제노사이드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왜 이제까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까? 하며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세계 곳곳을 직접 찾아가서 자료를 직접 수집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료들을 전시하기 위해 몇몇이 자비를 모아 평화를 품은 집을 건립했다.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 먼 나라들까지 찾아가게 했을 것이다.
제노사이드 역사 자료관으로 들어갔다. 세계의 학살 지역이 세계 지도에 표시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독일 홀로코스트,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대학살, 부족 차별이 부른 르완다 학살, 내전으로 일어난 콩고민주공화국 학살, 종교 · 문화 다름이 부른 코소보 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난징 대학살, 오키나와 강제 집단사 등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세계 곳곳에 표시되어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학살이 있었다니, 충격적이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사건도 많다고 한다. 한국의 학살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기 학살, 5.18 민주화 운동 내용이 벽에 포스터와 글로 설명되어 있었다. 이 세 사건에서 모두 죄 없는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제노사이드라는 반인륜적 행위가 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국제 사회의 의지에 따라 1946년 12월, 국제연합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가 국제법상 범죄 행위라는 사실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어 1948년 12월, 제노사이드에 관한 협약인 제노사이드 방지 및 처벌에 관한 협약을 승인하였다.
제노사이드 자료관의 피라미드 이론에 따르면, 1단계에서 6단계 제노사이드에 이르기까지 단계별 양상이 있다.
1단계는 미묘한 차별행위에서 출발한다. 생김새나 모습 등 사소한 편견을 가지고 차별을 하는데,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2단계는 편견과 편협함을 드러낸다. 희생을 강요하거나 비난하고 비인간적 대우를 한다.
3단계는 차별행위를 하는 단계이다. 인종차별적 괴롭힘이나 성희롱, 고용 · 주거지 차별 등.
4단계로 가면 폭력을 행사한다. 폭행, 테러, 파괴, 방화 등.
5단계에선 개인에 대한 극심한 폭력행사로 살인, 강간, 방화 등이 일어난다.
6단계가 제노사이드다.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한 민족 전체를 없애는 것이다.
강사는 우리나라에서도 2, 3단계 양상을 띠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별이 떠올랐다. 비정규직 · 외국인 근로자, 장애인, 성차별, 외모 차별 등. 최근 이런 신문 기사를 보았다. ‘너 전세 살지? 등본 떼보고 따돌리는 강남 초등학생들’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강남의 일부 엄마들이 자녀 친구들 집 등기부등본을 떼보고 사귈 친구인지를 정해준다고 한다. 심지어 1등급은 빚 없는자, 2등급은 빚지고 산자, 3등급은 전세로 분류한다. 어느 한 아이는 전세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해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기도 했다. 배경이나 출신으로 사람을 나누고 괴롭힘을 가하는 사례를 이렇게 언론을 통해 자주 접한다. 이런 근본이 된 일엔 자본주의 사회가 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한몫한다. 또한 아이들이 어른들에게서 본, 차별하는 시선 탓도 크다. 어릴 때부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의 말을 듣고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면 어떻게 될까.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 생긴 또 다른 예가 있다. 룰루 밀러 작가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면, 물고기를 분류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우생학에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미국에서 우생학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유색인종, 교도소에 갇힌 여성들을 ‘공공복지’라는 이름으로 강제 불임시켰다. 그 때문에 수많은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삶을 잃었고, 엄마가 될 수 없었다. 우리나라도 삼청교육대, 형제 복지원 등과 같은 강제수용소 사례가 있다. 사회가 없애 버리고 싶은 사람들을 부적합자로 분류해 벌어진 일이다. 그 분류가 그들의 생각을 의심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게 했다. 미국은 우생학을 지키려는 몰살을 목적으로, 우리나라는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이름 아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권을 침해하는 나쁜 씨앗이 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신에게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을 낮게 여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제노사이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가진 차별이라는 씨앗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인식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