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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한 손    
글쓴이 : 이성근    25-02-23 14:24    조회 : 91
   신비한 손.hwp (15.5K) [1] DATE : 2025-02-23 14:24:55

신비한 손

 

이성근

 

  "잘 있나? 내는 퇴직한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아이가. 요즘 어떻게 지내노?”

  "퇴직하고 반 년 정도 쉬다가 취직했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참말 부지런도 하다. 능력 있는 사람 맞다, 맞다. 내는 이제 나이가 들어가꼬 운동도 힘들다. 아따, 시상 와 이

   리 재미가 없노? 니 보러 가야겠다, 카이! 니 손 한 번 잡 아 봐야겠데이.”

  오래전 함께 근무했던 선배 선생님과 통화하면서 문득 내 손을 바라보았다. 작고 고왔던 손은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이제는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변해 있었다.

 

  남편은 현실감 없는 나를 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다른 건 다 잘하면서 왜 돈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어?"

  이 말로 시작된 잔소리는 늘 그렇듯 부동산 투자로 성공한 친구 부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돈이 생기면 은행에 정기예금으로 묶어두는 것이 전부인 나의 재정관리는 남편 친구 부인의 대규모 투자와 자주 비교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이어질 때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남편은 나를 지나친 안분지족형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젠가 꼭 한 건을 해내리라 다짐했지만,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허탈한 웃음만 흘렀다.

  그 즈음 수도권 제2기 신도시 발표가 있었다. 나는 판교에 집중했고, 아파트 여러 곳 가운데 최고 경쟁 단지를 점찍었다. 남편은 그곳은 경쟁률이 높으니 다른 곳을 선택하라고 했지만, 무슨 자신감에서인지 나는 내게 맡기라며 그 열기 가득한 단지를 선택해 청약 서류를 제출했다. 그런데 2천 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서 로또라고 불리던 A 타입에 덜컥 당첨되었다. 재산 증식에 관심이 없다고 투덜대던 남편은 나의 한 방에 놀라워했다. 나는 평생 해야 할 내 몫을 한 번에 끝낸 듯한 느낌이었다. 청약이니 투자니, 이런 머리 아픈 일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얼마 후 서판교 청약을 앞두고 친한 언니 두 명이 점심을 함께하자고 했다. 언니들은 그 뜨거운 동판교 청약에 성공했으니 좋은 기운을 나눠달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두 언니 모두 서판교 아파트에 당첨되었고, 묘하게도 같은 동 1층과 4층의 이웃이 되었다. 두 사람의 아파트 당첨이 모두 내 덕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1년에 두 번 정도 있는 모범 공무원 선발 공문이 내려온 날, 나는 학교 내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추천되었다. 공적 서류는 시 단위 교육지원청 검토를 통과해 도교육청과 교육부 선발 과정을 거친다. 최종 확정된 대상자는 대한민국 상훈 누리집에서 보름간의 공개 검증을 받아야 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공무원으로서 꼭 한 번 받아보고 싶은 상이었다. 운 좋게도 수상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수상자 발표 공문이 오자마자 여기저기서 축하 연락이 왔다. 이전에 함께 근무했던 교장 선생님은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나 보네. 적임자에게 상이 돌아가 기쁘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범 공무원상 수상 이후 선생님들은 내게 악수를 청하며 좋은 기운을 달라고 했다. 정말 상을 받아야 마땅한 선생님들의 손을 잡을 때는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가해졌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여러 곳에서 취업 제안이 있었다. 학교의 기간제 교사 자리도 있었지만 학교보다는 새로운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근무 형태가 자유롭고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을 골라 출근하게 되었다. 퇴직한 지 한참 된 선배들은 나의 인생 2막을 축하해 주며 부러워했다.

  "나도 그런 일자리 있으면 가고 싶네.”

  "치매 올까 봐 남편이랑 고스톱 치다 보면 하루가 다 간다.”

  "넌 운이 좋은 사람이야, 좋은 기운 좀 주라.”

  선배들은 내 손을 잡으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선생님은 왜 제 손을 잡고 싶어요?”

  "니 기억 안 나나? 스무 해 전인기라, 내 생일날 니가 미역국에 잡채까지 해서 상 차 려줬던 거 말이다.”

  "제가 그랬어요?”

  "아들 하나 있는 거 미국 가서 공부한다 카고, 남편은 일 땜에 딴 데 가 있었는데, 내가 혼자 있다꼬 생일상 차

   려줬다, 아이가.”

  선생님의 기억은 20년 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는 그날 이후로 니가 꼭 우리 친정 어무이 같더라. 니 손만 잡으면 근심 걱정이 싸그리 없어져뿌데이. 참말로

   신기하지 않나?”

 

  선배 선생님과의 통화를 끝낸 뒤,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핸드크림을 집어 들었다. 크림을 듬뿍 짜내어 손등 위에 얹었다. 주름진 손가락 마디와 거칠어진 손바닥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세월이 남긴 흔적들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촉감. 작고 보잘것없는 내 손은 어느새 온기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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