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의 마지막 한 마디
강덕수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복음 6,45)
장모님은 침대에서 몸을 돌리려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무엇보다도 욕창이 생길까 봐 자주 몸을 돌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게 누구든, 간병인이든, 딸이든, 손녀든 늘 ‘감사합니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남이 몸에 손을 대어 몸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 귀찮고 짜증 날 법하다. 그런데 장모님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짜증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나 땜에 고생하는구나’ 하고 미안해 하시곤 했다.
가끔 이상한 말씀을 하시거나 요구를 해 당황스럽게 만들 때도 있었다.
“장롱 구석에 까만 가방이 있어. 거기 돈이 있어. 이리 가져와!“
그러면 가방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라도 넣어 갖다 드려야 했다. 그래야 안심하고 잠이 드셨다. 그런 일은 아주 드물었다.
기억 상실이나 치매에 걸린다는 건 참으로 두렵다. 치매가 오면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술주정이 심한 사람이 술에 취하면 주위 사람들을 괴롭힌다. 술에서 깨면 자기가 무슨 말과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괴롭혔는지 전혀 기억을 못 한다. 치매도 그런 게 아닌지?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만 남아 인격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그래서 두렵다.
치매에는 많은 증상이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기억과 성격이 걸러지고 지워지는 과정인 듯하다. 그런 과정에서 환자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가장 오래된 기억, 가장 강한 성격만 남아 본인과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그런 걸 보면서 혹시 치매에 걸리더라도 가장 순하고 착한 성격만 남아 주위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다.
오래 병상에 누워 있다 보니 장모님은 치매인지 기억 상실인지 구분이 어려운 경우를 겪기도 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치매라고 얘기를 했지만,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니 일부러 치매 진단을 받으러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같이 사는 우리보다 가끔 방문하는 사람들이 장모님을 치매라고 할 때 거부감이 들곤 했다. 치매가 아니고 기억이 감퇴한 거라고 말하곤 했다.
장모님을 처음 만난 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이었다. 그때는 몸만 불편할 뿐 정신은 온전하였다. 소파에 앉으신 채 집안 대소사를 다 챙겼다. 어느 날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다 여주인공이 입은 옷이 마음에 들었다. 전화기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곤 의상실을 운영하는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송국에서 하는 연속극 여주인공 옷을 딸에게 해 주고 싶다고 주문하였다. 직장에 다니는 딸이 옷이 없어 아침마다 고민하는 걸 기억해 두었던 거다. 덕분에 집사람은 멋진 옷 한 벌을 얻어 입게 되었다.
장인어른은 4형제의 막내였다.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이었다. 형제간 우애가 아주 돈독하였다.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면 온 집안 식구가 다 모였다. 명절 때는 집집마다 다니며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다. 도중 어느 한 집에서 다들 모이면 사촌들과 어린 손자들이 어울려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딸이 많지 않은 집안에서 나는 사위 대접을 특별히 받았다. 덕분에 처가의 사촌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우리 애들도 자연히 외가의 육촌 형제들과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장모님의 배려가 있었다.
처가 집안 어른들 생신 때에 장모님은 선물 보내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선물 보따리를 나에게 맡겼다. 자연히 장인어른의 형님되시는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는 사위가 되었다. 제일 큰댁은 ”로열댁“이라고 불렀다. 처음 사시던 곳이 동부 이촌동에 있는 아파트였다. 둘째 큰댁은 ”청량리댁“이라고 불렀다. 청량리에 있는 큰 주택에서 살고 계셨다. 셋째 큰댁은 ”효자동댁“이라고 불렀다. 효자동에 있는 아담한 2층집에서 살고 계셨다. 생신 때는 혼자서, 설날에는 식구들을 데리고 인사를 가곤 했다.
시댁 어른들에게 선물 보내는 것을 장모님은 병석에서도 잊지 않았다.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모든 염려를 손에서 놓았다. 병원에서 폐렴은 일단 잡혔으나 완치가 안 된다는 판정을 내렸다. 마지막을 편안히 지내도록 집으로 모시고자 했다. 아마 장모님이 의사를 표현하실 수 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주위 사정으로 그러하지 못했다. 장모님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병원에서 연명 치료를 받아야 했다. 연명 치료가 시작되자 장모님은 말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침저녁 집사람은 중환자실의 장모님에게 귓속말로 식구들 안부를 전해 드렸다. 그럴 때마다 장모님은 눈물로 답을 하였다. 24시간 투석으로 연명하게 되자 환자에 대해 마침내 의사가 포기를 선언했다.
임종의 순간 우리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마지막을 지킨 집사람만 마음에서 넘쳐 눈빛으로 배어나는 어머니의 진심을 읽었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