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여인’
김동원
토요일 오후 걷기 운동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올 듯하여 우산을 갖고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10 여분이 지나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치고 걷는 데 쉬이 그칠 비가 아니기에 운동은 그만하고 커피 마시면서 노래를 듣고 싶어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갔다.
커피와 함께 창가에 앉아 아이돌그룹 비스트의 ‘비가오는 날엔’을 들었다. 커피 한 모금 마시며, 눈은 비 내리는 경치를, 귀는 애인과 헤어지고 비오는 날에 애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들으니 옛 추억들이 떠올랐다.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었을 때쯤 창밖으로 걸어가는 한 여인을 보며 나도 모르게 탁자를 ‘탁’ 쳤다. 노란 우산에 노란 레인코트를 입은 여인을 보자 한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지낸 첫사랑의 여학생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고3이던 1990년,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여학생을 좋아했다. 이사 온 중3 때 처음 봤는데 그때는 이쁘다는 생각만 했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고 자주 볼 수도 없었다.
수험생에게 가장 중요한 고2 겨울방학 때 맹장수술을 받고 일주일 넘게 입원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이 든 상태에서 고3이 시작되고 그 여학생을 보자 더 이뻐졌다는 생각과 동시에 심장이 막 뛰기 시작하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좋아하게 되었다. 첫사랑이 짝사랑이었다.
좋아하게 되어 그런지 이상하게 그 여학생을 평소보다 자주 보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얼굴이 빨개졌고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여학생을 보면 좋았고 이렇게 좋아하는데 여학생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하면서 평범한 나를 좋아하지 않으리라 단정 지었다.
여름방학이던 어느 날 보충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야 하는데 비가 많이 왔다. 교복을 안 입어도 되기에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1층의 집 문을 열고 나가니 방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지 노란색으로 뒤덮인 그 여학생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여학생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 나를 보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노란 레인코트에 모자를 쓰고 노란 장화를 신은 여학생은 이쁘고 깜찍한 노란 천사 그 자체였다.
그 여학생도 보충수업 듣기 위해 학교에 가는 길이리라. 여학생이 다니는 학교는 왼쪽으로, 내가 다니는 학교는 오른쪽으로 가야 했다. 기쁨도 잠시 바로 다른 길로 가야 하는 아쉬움이 클 때 여학생이 노란 우산을 펴더니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왼쪽으로 가는 길이 지름길인데 돌아서 가는 오른쪽 길을 선택하니 기뻤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여학생은 노란 장화로 빗물 사이를 천천히 걸었고 그 모습을 기분 좋게 보며 바라보며 천천히 2m 간격을 유지하면서 뒤따라 갔다. 말을 걸면 좋았겠지만 용기가 없었고 서로가 고3이기에 말을 걸면 안된다고 생각해서 2m 공간에 함께 있음에 만족했다.
3분이면 도착하는 갈림길을 천천히 걸었기에 10분이나 걸렸는데도 빠르게 도착했음에 아쉬웠다. 그 시간 동안 여학생이 두 번 뒤를 돌아봤는데 왜 앞서가지 않냐고 묻거나, 뒷모습 말고 이쁜 얼굴도 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고 앞서가면 여학생을 볼 수 없기에 앞서갈 수 없었다. 갈림길에서 여학생은 오른쪽으로 나는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 갑자기 오른쪽으로 가지 않고 조금 더 돌아가는 길로 직진하는 여학생을 보며 다시 한번 놀라며 왼쪽으로 가지 않고 그 뒤를 계속 따라갔다. 다음 갈림길 까지 최대한 천천히 가는 여학생을 보면서 처음으로 나 혼자만 좋아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곳에서 여학생은 오른쪽으로 나는 왼쪽으로 각자의 학교로 가면서 그 여학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너 번 돌아보았다.
그날 이후로도 그 여학생을 자주 보았는데 인연은 아닌지 만남이 이어지거나 사귀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신중현이 만든 노래 ‘빗속의 여인’을 알게 되고 노래 가사가 똑같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 그날의 상황과 비슷하여 이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김건모가 리메이크 한 ‘빗속의 여인’을 더 좋아했는데 이 노래를 들으며 그 여학생의 그때 모습을 떠올렸다.
20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그때 그 여학생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사귀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봐도 그때처럼 이쁠까? 등 많은 생각을 했는데 중요한 건 내가 정말 그 여학생을 많이 좋아했다는 거였다.
마흔 살이 넘어서면서 이 노래도 그 여학생도 잊혀졌는데 지금 다시 ‘빗속의 여인’을 들으며 그때 그 여학생의 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라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