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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수지와 방죽의 추억    
글쓴이 : 박희래    25-09-20 20:23    조회 : 2,119
   저수지와 방죽의 추억-2025년 9월 발표작.hwp (69.0K) [1] DATE : 2025-09-20 20:23:09

저수지와 방죽의 추억

박희래

 

  고향에는 팔십 호가 넘는 집들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처럼 정겨웠다. 오백여 명의 주민들은 작은 공동체 사회를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마을에는 저수지와 방죽 두 개의 중요한 농업용수 공급원이 있었고 여러 가지 추억을 안겨주었다.

   저수지와 방죽의 물은 각종 농작물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방죽 옆에는 키가 큰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바짝 붙어 있어 동네 주민들 만남의 장소와 쉼터 역할도 했다. 당산나무는 마을을 수호하듯 넓은 그늘로 뜨거운 햇볕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대바구니를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마수는 작업을 하면서 삶을 나누고 최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로 언제든지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정월 보름에는 당산나무를 돌며 당산제를 지냈는데 일 년 동안의 건강과 풍년을 빌었다. 여름마다 매미들은 당산나무 가지에서 사랑을 외치며 서로의 목소리를 뒤섞어 웅장한 하모니를 만들었다. 경지정리가 아직 안 된 천수답은 물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저수지와 방죽은 농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방죽은 저수지보다 작은 규모이지만 접근성이 좋았다. 저수지는 당산나무로부터 칠백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저수지와 방죽은 많은 추억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물이 빠진 저수지와 방죽에서 팔뚝만 한 각종 물고기를 삼태기로 퍼 올린 적이 있다. 물고기를 잡는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시름을 잊고 즐거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어른들도 마치 동심으로 되돌아가는 기쁨을 누렸다. 저수지가 홍수로 범람해 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그해 겨울 농한기 때 마을 주민들이 저수지 위의 논들을 급히 공동으로 구매해 부랴부랴 사방공사를 시행하였다. 저수지의 깊이와 넓이는 어린 나에게는 대단해 보였다.

  마을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방죽은 저수지에 비해 크기도 작고 깊이도 얕다. 농사철에는 농작물에 물을 대는 데 사용되기도 했고 겨울방학 때는 주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하지만 저수지와는 다르게 별도로 관리인은 지정되지 않았다. 아마도 방죽은 누구에게나 눈에 쉽게 띄는 곳에 있어 그렇지 않았나 싶다.

  평소에는 졸졸 흐르던 마을회관 옆 도랑도 여름 장마철에는 산과 집마다 토해내는 흙탕물로 넘쳐났다. 무서운 속도로 떠내려가고 소리를 내며 아랫마을 시냇가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비를 맞으며 도랑에서 물놀이하는 것은 비를 맞고 축구하는 것만큼 재미를 주지만 위험천만하다. 한 번은 도랑에서 놀다가 급물살에 휘말려 넘어져 쓸려가다 멈춘 적도 있었다. 몸 이곳저곳이 좀 까이고 다치는 선에서 그친 것은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행여 저수지 둑이 무너질까 봐 저수지 지킴이라는 당번은 담수량을 보고 우기에는 미리 수위 조절을 한다. 순번제로 돌아가면서 일 년씩 하는 저수지 당번 수문 개폐는 특별한 경우 마을 이장과 동네 주민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나 대부분 저수지 당번의 권한으로 시행되었다. 손잡이 모양의 스핀들 식 수문 열쇠에서 수문까지 연결된 굵고 튼튼한 철제 톱니바퀴가 있었다. 저수지 열쇠는 왼쪽으로 돌리면 잠그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열리는 방식이었다. 철로 되어 있어 녹이 슬면 생각보다 빡빡해 두 사람이 힘을 합해 돌려야 할 때도 있었다. 당번 일을 할 때 아버지는 주로 위에서 수문을 열고 나는 저수지 물이 나오는 배수구가 있는 아래쪽까지 가파른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 물량이 얼마만큼 잘 나오는지 확인하여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중학교 여름방학 때는 담력 테스트를 한다고 해서 한동네에 살고 있는 동창들과 저수지에 같이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동무가 저수지를 건너갈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리며 말리기도 전에 벌써 헤엄쳐 건너가고 있었다. 가장자리도 아닌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우리들 눈에는 그 녀석이 점점 지쳐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누가 들어가서 구해줄 수도 없었다. 저수지가 워낙 넓고 깊었고 수영 실력이 다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다 건너가기도 전에 기진맥진했다. 중간쯤 건너갈 때 앞으로 나아가기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고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저수지에서는 될 수 있는 한 물놀이를 하지 말 것과 밖으로 빨리 나올 수 있도록 가장자리에서 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죽은 겨울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꽁꽁 언 방죽에서는 팽이치기, 제기차기, 연날리기, 발 스케이트와 앉은 썰매 타기를 했다. 아이스하키 채와 비슷한 소죽아꾸레이(곰부라떼)를 가지고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재미나게 노는 게 일상이었다.

  한 집에 적어도 대여섯 명씩 되었던 베이비부머 시대 아이들은 도시화와 핵가족 시대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길 것만 같던 그 시절은 흐르고 역사는 새로운 주인공들에 의해 다시 씌어져 간다. 저수지와 방죽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시간 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에는 빨리 자라 성인이 되면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가기를 원했으나 학생 시절을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 보냈던 것이 지금은 행복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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