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가슴 밝은 한 남자를 만났다. 이원규라는 이름 뒤엔 ‘시인’이자 ‘생명평화운동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좋은 생각」에서 선물로 보내 준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라는 책을 덮으며, 제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빼앗기고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그는 발바닥에 날개를 달고도 이 땅에 당당히 발을 딛고 서 있었으며 그가 말하는 가슴의 언어는 자체로 시(詩)가 되었다.
지리산으로 찾아든 지 7년째, 그는 걸으면서 술(酒)을 익히듯 산(山)의 언어와 돌(石)의 언어와 물(水)의 언어를 익혔다. 그렇게 익힌 몸의 언어를 글로 쏟아내고 있었다. 지리산에서의 새로운 삶을 지수화풍(地水火風)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고백한다. 어떻게 감동하지 않겠는가. 세상의 명예와 부와 욕망을 내려놓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머무르다 갈 줄 아는 추측건대 ‘40대 중반의 사내(?)’에게서 풀꽃 향기가 난다.
그는 느리게, 천천히, 여유 있게, 한가하게, 둘러보며 느림의 미학을 깨달았고, 걷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의 기도이자 세상 만물과 비로소 하나가 되는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을 새롭게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려 걷고 또 걸었다고 한다. 강원도 황지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낙동강 1,300리를 걸었고, 지리산 아래 850리를 도보순례 하고, 백두대간 종주 1,500리 길의 지원과 새만금 삼보일배 800리 길을 세상의 가장 느린 속도로 걸었다고 한다. 몸의 기억에 모든 생각을 맡기며 그렇게 체득한 언어를 풀어내고 있었다.
인간의 발걸음은 빨라야 하루 40킬로미터를 갈 수 있고, 바로 이 거리에 대한 오랜 경험들이 ‘백 리 길’이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리라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는 작가, 그뿐만이 아니라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나 북상하는 꽃의 속도가 사람의 발걸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더불어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이는 누구나 사전 지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직접 해 보지 않고는 또 제대로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책이나 교육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과 직접 몸으로 체득되는 지혜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친구 시인의 시구를 통해 두 끼니를 걸러보고 실천하는 사람.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시인에게 다가가 먼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손 내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세상에 찌든 내 영혼을 말끔히 헹구어준 시인이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