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되자 서둘러 아이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인터넷과 휴대폰에 꼭 필요한 와이파이부터 해결하고 저녁을 먹으며 하루 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헤어져야 할 시간 "우리 딸, 잘 할거야... 즐겁고 건강하게 잘 지내다 와" 하며 꼭 끌어안았다.
다음날 공항으로 오는 길에도 늘어선 벚꽃들이 환한 얼굴로 무심하게 웃고 있었다. 부풀어 커지는 빈자리에 자꾸만 차오르는 부질없는 생각과 물기 차오르는 마음을 꾹 누르며 돌아와야 했다.
그리곤 계절마다 EMS상자에 먹거리며 옷 따위를 눌러 담아 보냈다. 조금이라도 더 담아 보려고 압축 또 압축을 했다. 초반엔 지진 때문에 다음엔 방사능 때문에 걱정되고 불안이 차올랐지만 아이가 블로그에 올리는 일상들은 오히려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 홀로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았다.
12월 말부터 1월초까지 열흘간 겨울방학이라 기숙사도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들어왔다 가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룸메이트와 다른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면서 교토, 나고야, 히로시마, 오사카 이렇게 여러 곳을 돌면서 연말연시를 보냈다. 각 가정에서 설음식도 먹고 세뱃돈도 받으면서 명절 체험을 잘 하고,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훈훈한 대접을 받았다고 흐뭇해했다.
1월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정리를 시작한 아이는 생활용품들은 필요한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또 치우는 일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리고는 여름옷과 물건들을 부쳐왔다.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나는 여행 때면 즐겨 읽는 기욤 뮈소의 최근작 한 권과 아이가 부탁한 몇 개의 선물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어두워질 무렵에 도착한 공항에서 리무진을 타고 한 시간 반을 더 달려 도착할 때까지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멀리서 트렁크를 끌고 나타나는 딸아이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에 얹혀있던 무거움이 봄눈처럼 녹아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이가 미리 예약해 놓은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기숙사에 들려 마지막 인사를 하기로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서 눈발도 날리고 비록 날씨는 궂었지만 평소에 아이가 주로 다니던 곳들을 함께 가보면서 그동안 지냈던 일상을 되짚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인사해야할 곳에 들려 갖고 간 선물을 건네면서 아이는 그곳에서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교토는 물맛이 좋아서 맛챠와 두부가 유명하고, 겨울에는 유도휴를 먹어야 제맛이라서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다는 코스로 이끌었다. 붉은 동백꽃잎이 떨어지는 정원이 내다보이는 자리에서 여러가지 요리의 두부를 맛보면서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돌아와서 새로 시작해야하는 부담을 내비치는 아이에게 지금까지 혼자 잘해왔던 것처럼 잘 할 수 있을거라는 격려 외에는 해줄 수가 없었지만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 서로 따뜻했다. 또 교토는 녹차도 유명하기에 숨은 맛집을 찾아 녹차 카스테라 파르페를 먹기도 했다. 짐이 워낙 많아서 더 늘이면 안되었지만 결국 겨울에만 한정된 것 이라는 말에 유자와 녹차 맛이 반씩 섞인 바움카스테라 몇 개를 사고 말았다.
그동안 늘어난 짐을 다시 끌고 돌아오는 길, 팔은 비록 무거웠지만 마음은 가볍기만 했다. 누르면서 담고있는 일 ,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반복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일이란 때가 되어 매듭이 풀리는 순간을 기다리며 견디는 일인 것 같다.
? 집에 들어선 후 가져온 트렁크들을 여는 순간 쏟아져 나오는 아이의 일상들이 편안하게 제자리를 찾기 바래본다. 동시에 내 마음의 압축도 풀리며 비로소 안도감과 평온함이 부풀어 올랐다.